절세의 기게 원정 최수성의 마을 원정리
“보청천 물줄기, 최수성의 올곧은 선비정신 품어”
상태바
절세의 기게 원정 최수성의 마을 원정리
“보청천 물줄기, 최수성의 올곧은 선비정신 품어”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4.02.29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속리산 천왕봉 금강을 만들다.

글 싣는 순서
1. 하늘아래 첫동네 신선을 만들다. 
2. 물은 흘러 속리구곡이라 부른다.
3.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외침을 듣다. 
4. 고봉 김정선생, 이상정치를 키우다
5. 깃대의 기상과 오천 군사 목을 축이다.
6. 절세의 기게 최수성의 마을 원정리.
7. 흘러간 물은 다시 청산에 잠기다.
8. 비단의 금강, 백제 문화를 만들다.

 작은 개울이든 큰 강줄기는 그 시작이 있으며 산을 넘지 못하고 아래로 흐른다. 속리산 천왕봉은 옛 고서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속리(俗離) 삼파수(三波水)라 불리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은 아래로 흘러 한강, 낙동강, 그리고 금강으로 흘러 세갈래로 흐른다고 전하고 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작은 하천이 모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만들고 다시 아래로 흐른다. 
보은은 지정학적으로 백두대간중 한남금북정맥을 배산을 형성하고 있어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의 발원지 마을을 따라 삶의 터전속에 묻어 있는 문화와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편집자주>
 

원정리 마을 전경.
원정리 마을 전경.

“원정 최수성, 신사임당에게 예술적 유전자를 전한 인물 ”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삼가천에서 적암천과 만나 보청천을 만나 제법 큼 강줄기로 마로면 기대리, 오천리를 지나 이제 원정 최수성의 마을로 흐른다. 
조선시대의 인물인 원정 최수성의 집안은 강릉에 근거지를 둔 최씨 집안으로 여말선초에 지역 사족으로 성장해가는데 그 중심에 세종대에 형조참판을 지낸 최치운(1390~1440)과 연산군대에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1428~1507)이 있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최수성에게 증조가 되는 최치운은 세종이 아낀 문신으로 법의학서인 『무원록(無&#20900;錄)』을 주석했고, 조부 최응현은 선비 정신을 중시하여 80에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숙부 최세절 또한 장원 급제한 재원으로 참판과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하지만 최세절은 자리에 연연한 탓인지 무절(無節)·무상(無狀)의 아이콘이 되어 선비들의 조롱을 한몸에 받게 된다. 인물됨에 절조도 없고 볼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최수성은 권간(權奸)의 농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숙부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원정 최수성은 신사임당(1504~1551)에게 예술적 유전자를 전한 인물이다. 홀로 그림 공부를 했다는 사임당의 배후를 추적하다 보면 외당숙인 최수성을 만나게 된다. 사임당의 어머니에게 외사촌이 되는 최수성은 천부적 재능을 가진 화가로 중국 동진의 화가 고개지(顧愷之)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곤 한다. 숙질(叔姪)간인 최수성과 신사임당은 생물학적 유전자뿐 아니라 생존 연대가 겹치는 15년이라는 세월과 강릉 북평촌이라는 공간적 공유를 통해 직.간접적인 사숙이 이루어진 것이다.

“원정 최수성이 자연주의적 삶을 찾아온 마로면 원정리”
원정 최수성이 활동한 16세기 초는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는 한편 뜻있는 선비들에게는 큰 상처를 남긴 시대였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뜻을 나눈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이 사회개혁을 추진하다 화를 당한 기묘사화는 최수성을 한층 더 자연주의적 삶으로 이끌었다. 자연주의적 삶을 추구해 찾아온 곳이 지금의 마로면 원정리이다.
마로면 원정리에는 원정 최수성이 살았으므로 원정 또는 원징이라 하였고 한다. 자연마을인 모동(보리골, 관리동, 본리골)은 원정 동남쪽에 있는 마을. 우암 송시열이 관리동으로 이름 지었는데 그후 현감의 전령문서에 관리동을 속칭한 보리골로 착각하여 ‘모동’이라 썼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점동’은 사모바우 동쪽에 있는 마을로 토기점이 있었다고 한다.
또 가지골은 원정에 딸린 골짜기. 가지골 돌다리는 가지골 앞에 있는 돌다리로 원정 최수성이 음양을 맞추어 놓아서 아무리 심한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너소’ 라고 불리는 마을앞 보청천에 있는 소(沼)로 늘 깊은 물이 고여 있다고 하며 바리봉산은 점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347m로 점동에서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라 하여 바리봉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지금의 원정2리는 ‘바른골’ 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있는데 원 골이 바르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바우배기산’ 이라 불리는 산에는 바위가 많다고 한다. ‘분무골’ 은 원정2리 골짜기로 옛날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며 사모바우는 모동 서북쪽에 있는 바위가 사모처럼 생겼고 ‘삼밭골’ 은 원정 2리 골짜기에 삼밭이 많았는데 수확이 많았다고 한다. 상운암(祥雲岩)은 장군봉에 있는 바위로 구름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장군봉은 모동 북쪽 산에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 있다고 한다. 최원정 탑은 ‘탑싸리’에 있는 오층 석탑으로 최원정이 세웠다고 하고 큰 골은 원정 2리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크다고 한다. ‘탑싸리’는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오층석탑을 탑 싼이라고 한 것이고 황개들은 보청천과 세중천의 합수 지점에 있는 들로 침수가 잘 되며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모동 서남쪽에 흑연광산이 있는데 1917년부터 4년간 일본 사람이 경영하다가 한일 광업주식회사가 불하를 받아 1958년부터 흑연을 캐다가 지금은 폐광이 되어있다.
원정리 3층 석탑은 탑산리에 있는 것으로 높이 3.68m의 3층 석탑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8호로 지정되었으며 1층, 2층, 3층의 탑신석은 모두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각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소문이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급격하여 중후한 느낌은 없다. 전체의 형태나 그 조성수법으로 보아서는 신라형을 따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1982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올 곧은 선비의 표상이었던 원정 최수성의 기게가 보청천의 물줄기와 만나 더욱 거센 물줄기로 호서지방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원정리 마을 보청천.
원정리 마을 보청천.
원정 최수성 선생 영정.
원정 최수성 선생 영정.
원정리 점동마을 소하천.
원정리 점동마을 소하천.
원정리 3층석탑.
원정리 3층석탑.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