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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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 소동
  •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 승인 2024.02.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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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직장이 현대그룹의 최전방에 섰던 종합무역상사였다. 1970년대 중반에 출범한 한국의 종합무역상사는 오랜 기간에 걸쳐 무역입국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목표로 정부가 앞장서서 금융과 세제 지원으로 육성한 국영 무역회사 비슷한 형태였다. 정부 정책에 힘입어 34년간 주요 대기업의 해외업무 창구 역할을 하면서 특혜 논란 속에서도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비즈니스라고는 첫 글자도 모르던 나는 현대그룹이 해외지사 요원을 선발한다고 해서 앞뒤 재보지 않고 뛰어들었다. 낮 시간대에 죽어라 일하고 야간에는 학위과정에 등록하여 모교로 향한 마지막 비상구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총 200명이 선발된 경력직 공채 1기 앞에 제시된 25개소 해외지사 중 쟈카르타를 희망한다고 써냈다.  
   19박 20일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울산현대조선소에서 열렸다. 이때 처음으로 60대 초반이었던 정주영 회장이 등장하였다. 창의력 계발을 특히 강조했고, 건강에 관한 얘기가 많았던 것 같다. 신입사원을 상대로 씨름도 하였는데,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신입사원에게는 호통을 쳤다. 햇수로 8년 현대그룹의 유니폼인 짙은 청색 점퍼를 입고 있을 때 내가 한 일은 나사못을 줍는 수준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움직였으므로 신입 몇몇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한국경제의 본격적인 산업화는 조선공업과 중동진출이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초국가적 해외사업을 현대그룹이 앞장서서 개척했고, 그 중심에 정주영이 있었다.
   한국의 조선공업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도안으로 시작되어 황량한 울산 바닷가에 거대한 도크를 만들면서 동시에 갑판 길이가 270 미터에 달하는 26만 톤짜리 초대형 유조선(VLCC)을 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정주영 신화의 개막이었다. 1975년 여름 박 대통령이 정 회장을 불렀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중동 산유국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해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배럴당 2.9달러였던 유가가 하루아침에 12달러로 4배가 올랐다. 산유국은 ‘알라(Allah)의 검은 황금’을 한껏 칭송하며 항만과 공항, 신도시, 발전설비와 대규모 주택단지, 담수(淡水)화 시설 등 초대형 산업인프라 건설을 열망했으나 선뜻 나서는 나라가 없었다. 친미국가로 분류되어 눈 밖에 났던 한국에까지 청신호가 왔다. 박 대통령은 즉시 고위 관리를 파견하였고, 2주 만에 들고 들어온 보고서에는 낮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가고 건설공사에 수요가 엄청난 물이 없어서 어떠한 공사도 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임자가 갔다 와. 임자도 안된다면 나도 포기해야지...”. 낙담한 대통령을 위로하며 정 회장이 답했다. “오늘 당장 떠나지요”.
   닷새 만에 대통령 앞에 나타난 정 회장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며 중동(中東)은 틀림없이 한국경제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낮 기온이 50도나 된다던데... 예, 낮에는 자고 밤에 횃불을 밝혀놓고 일하면 됩니다. 물은? 원유를 싣고 와서 비우고 나갈 때, 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워가겠습니다. 모자라지 않을까? 그때는 물길을 찾아 나서야지요. 물이 없겠습니까, 찾으면 반드시 있을 겁니다. 더구나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니 중동은 건설공사의 최적지이며, 모래와 자갈이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금상첨화입니다. 우리가 ‘오일쇼크’로 지독한 겨울 한파에 떨고 있을 때, 박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의기투합해서 달랑 3,000만 달러뿐인 당시 외환보유고를 밑천으로 극심한 국내외의 반대와 조소(嘲笑)를 무릅쓰고 중동진출을 감행했다. 정 회장은 30만 명에 달하는 기술자와 전문인력을 중동 건설현장으로 실어 날랐고, 귀국편으로 보잉747 특별기를 띄울 때마다 고액권 달러를 ‘꽉꽉’ 채워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의 육두문자는 유명했다. 이봐, 채금자(책임자)가 누구야? 해 보기나 했어? 여기까지는 보통화법이고, 화가 치밀 때 튀어나오는 욕지거리가 바로 ‘빈대만도 못한 놈’이었다. 정 회장의 고향 강원도 통천(군)의 초가집에는 그렇게 빈대가 많았다고 했다. 침상 네다리를 물을 가득 채운 대야와 양동이에 담가 놓았다. 설마 빈대가 헤엄쳐서 기어오르지는 못하겠거니 했지만, 불만 끄면 여전히 빈대가 득시글거렸다. 천정으로 기어 올라간 빈대가 침상 위로 뛰어내리더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빈대 소동으로 ‘정 회장의 빈대’가 오롯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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