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만 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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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만 품었으랴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3.12.2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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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공부하는 일행이 답사를 다니던 중 부여박물관을 거쳐 아슬아슬하게 좁은 농로를 조심조심 움직이는 버스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나무이면 위험을 무럽쓰고 찾아뵈러 가는 걸까 심드렁했다. 천오백 살 드신 은행나무를 뵈러간단다. 우리들의 불안을 눈치 챈 담당 직원이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한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전설들이 책을 읽는 것처럼 줄줄이 흐른다.  
백제가 겪어야했던 온갖 고난을 품고 있는가하면 한반도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예고를 했다고 한다. 불안함은 사라지고 호기심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백제의 사비 천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전후해서 좌평(지금의 장관 정도의 벼슬) 맹씨가 심었다고 한다. 아마 나당연합군에 쫓기는 백제의 고난을 슬퍼하며 심지 않았을까 싶다. 나무들도 긴 세월을 품으면 영적인 기운이 발생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도 스민 나무님이시다. 고려와 백제 신라가 망할 때마다 칡넝쿨이 칭칭 감아서 힘들게 하는 예고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 넘어 암자의 주지스님이 절의 증축을 하던 중 대들보가 필요해 이 나무의 큰가지를 베어가다가 돌연사 하고 그 암자도 폐허가 되었단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큰 가지하나가 저절로 부러지는 암시가 있었고 또한 반대쪽의 큰 가지가 부러지더니 의병이 봉기하였단다.   
내 생각엔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백제가 망하면서 의자왕과 왕자 융, 많은 대신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비운의 원혼들이 이 나무에 한으로 서려있지 않을까 싶다. 예부터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어야했던 한반도의 사연들을 다 품고 있을 것 같다.  
한참 재미가 쏟아지는데 도착이다. 주암리 은행나무시다.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야산의 확 트인 공간에 자리 잡고 서서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자네들은 또 나를 두고 무슨 이야기를 엮을 것인가?” 하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엮는 것이 아니라 천년세월 품은 당신의 이야기들 다 꺼내고 싶소이다.”  
펼 수 있는 한껏 팔을 벌려 재보니 네 번을 돌아도 팔 길이가 모자라는 둘레다. 둥지를 안고 돌다가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괜히 수줍어서 피했다. 키 높이보다 서너 뼘 위쪽에 기다랗게 아래를 향해 뻗은 것이 꼭 남자들의 거시기를 닮았다. 담당 직원의 말로는 ‘유주’ 즉 젖기둥 이라고 한다. 당장 폰을 열어 검색해보니 워낙 오래된 나무들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것만으로는 호흡이 모자라서 보충을 위해 자체적으로 내린 뿌리가 흙이 아닌 허공에서 자란다고 한다. 석회암 동굴의 종류석처럼 아래로 자라다보니 남근을 닮게 되었다. 나무의 입장으로는 힘들고 답답해서 만든 조직이지만 아들을 갈망하는 여인들은 나무의 속내도 모르고 만지는 걸로 모자라 조금씩 도려내어 품고 가는 수난의 흔적이 있다. 만지고 자른 여인들 소원성취 하셨는지 궁금하다. 이왕이면 아들 낳으소서. 
1.500살이 학술적으로는 불가인지 모르지만 천년세월이라면 셀 수 없이 긴 세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우리민족이라서 나도 산술적 세월보다는 세월이 남기고간 사연들에 관심이 쏠린다. 노인이 지닌 상식이 도서관 하나를 차지한다면 천년세월 말 못하는 고목들이 지닌 희로애락 사연들은 얼마나 웃고 울고 가슴 아파 하려나. 세월에 부대끼면서 얻은 몸에 깊은 상처는 성형 수술을 한 흔적이 있다. 정이품송의 표피치료를 보았기에 나도 조금 알게 된 작업이다. 표피제거 부위에 우레탄 고무로 본을 떠서 인공 표피를 붙이는 수술이다.   
다녀온 날 밤 
수십 년 세월 쓴 내 일기장을 다 태웠다. 살아온 세월 열어보니 잘못된 일에는 죄다 남편 탓 가족 탓이지 내 탓은 반의반도 안 된다. 낯 뜨겁다. 마치 흑백을 가려 주겠다는 듯 써내려 왔지만 후손에게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훗날 내 무덤에 찾아와서 원망으로 속 풀이를 하든 고맙다고 감사해하든 너희 맘 편한 데로 하려무나. 천년세월 품은 고목들처럼 나도 너희에게 말 못했던 사연들 그냥 안고 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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