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지역발전에 헌신한
상태바
보은 지역발전에 헌신한
  • 보은신문
  • 승인 1991.03.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운 박기종 선생
보은의 큰 일꾼으로 추앙받던 제5대 국회의원 용운 박기종 옹의 영결식이 지난 3월22일 하늘도 슬퍼하듯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지난 3월 18일 새벽 3시 보은읍 장신리(비룡소)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 5일장으로 거행된 용운 박기종 옹의 영결식은 전국에서 수천여명의 조문객과 1백여 조화가 답지해 고인의 타계를 애도 하였다.

향년 81세로 타계한 용운 박기종 옹의 영결식날인 22일엔 그의 유가족과 조문객 등 6백여명의 애도속에 유교·불교·천주교식 장례의식으로 거행되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조문객들로부터 부의금 일체를 받지않고 주문식으로 답지되어 어쩔 수 없이 받아놓은 조화만 상가앞 화물차에서 비를 맞고 있어 상가의 분위기를 더욱 슬프게 하는 가운데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고인의 우인 대표로 거송 김만철 옹은 추모사를 통해 "같은 보은에 태어나 대립이나 이해상충 없이 우정적 차원에서 50여년간 교분을 유지해왔고 고인과 담수회를 조직, 매일 모임을 갖고 유년시절의 회상과 지역발전을 위한 대화를 가졌었다" 며 "용운 박기종 옹은 지역 발전과 조국 재건에 이바지 하기위해 애썼을 뿐 아니라 기업가로서는 근면 성실한 자세로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고 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국회의원 박준별 민자당 보은·옥천·영동 지구당 위원장은 "용운 박기종 의원님은 평생을 향리에서 군민과 더불어 희노애락을 같이하며 서민생활을 영위하셨기에 많은 군민이 오늘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선배께서는 일제치하에서 일인들의 악날한 경제적 갈취수단을 근검 절약의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하고 보은 중등교육기관의 시초인 보은농고 건립에 참여, 육영사업에 애쓰셨었다" 며 "야당정치의 수난기였던 제3공화국 20년동안 한결같은 정치노선을 지키며 이 나라 민주발전에 기여하셨기에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는 이때 선배님을 보내는 많은 군민의 아쉬움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고 추도했다.

이어서 법주사 유월탄 주지로부터 발인예절식인 시다림(尸茶林)이 있었고 보은 천주교 김성규 신부로부터 출관예절식(고별식)이 있었다. 장례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고인의 유가족과 친지들의 애통한 통곡소리가 빗줄기 소리와 더불어 더욱 슬픔을 자아내자 조문객들은 고이느이 죽음을 더욱 안타까와 했다. 발인제를 마친 뒤 조화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이어 만장(輓章. 죽은 이를 애도한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기처럼 만든 것)과 고인을 모신 영정(影幀), 혼백을 모신 요요가 그 뒤를 따랐다. 꽃상여 앞에서 스님들이 극락왕생을 비는 가운데 조상 대대로 살아온 비룡소 자택을 떠나 우회도로 사거리 공터에서 보은농고 학생들과 주민들의 애도속에 노제(路祭)를 지냈다.

보은농고 밴드부의 애도곡속에 보은농고 박재현 교장은 조사(早辭)를 통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후진 교육발전을 위하여 1943년 보은농고 건립비와 부지를 희사. 보은에서는 처음으로 중등교육기관을 세우고 학내 방송시설 일체와 8천평의 장학답을 기증, 그 이익금으로 오늘날까지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에게 매년 용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며 "용운 장학회 이사장이었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후학들은 학문연구와 지역사회 발전에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삼가 영전에 보은농고 졸업생 7천30명을 대표한 김종철 총 동창회장과 재학생 7백여명을 대표한 신현상 학생회장과 함께 명복을 빈다" 고 말했다.

장례행렬이 시내 중심가를 지나자 많은 주민들이 장례행렬을 지켜보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가운데, 고진감래속에 가업을 일으켰던 구정미소(보은읍 삼산5구)와 대동물산(보은읍 죽전)을 거쳐 장지인 보은읍 금굴리 부락 뒷산에 도착, 유교·불교·천주교식 하관의식속에 고인의 유해는 안장 되었다. 1911년 보은읍 장신리에서 출생, 24세때부터 정미업을 시작한 용운 박기종 옹은 (주) 대동물산과 (주) 보은교통을 창업 경영한 군내 몇 안되는 자수성가한 기업가이다.

또한 보은농고 설립을 주도하고 8천평의 장학답을 기증하며 용운장학회와 동정국교를 설립하는 등 국가백년대계인 육영사업을 묵묵히 실천한 의인(義人)이기도 했다. 제5대 민의원으로 등원 9개월만에 5·16으로 국회를 떠나야 했고, 끝까지 야당으로 일관해온 고인을 모든 사람들은 '평생 지조와 절개로 살아온 인물'이라 평한다. 보은 제일의 거부(巨富)였던 박기종 옹 그는 절약과 근면, 성실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인물 이다. 또한 육영사업 등 각종 사회환원사업에 심형을 기울인 부자다운 부자였다.

좋은 예로 점포의 세입자에게 십수년간 세를 올려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고인에 얽힌 미담중의 하나이다. 5·16으로 인해 반년만에 끝난 지방자치제가 다시 30년만에 부활, 기초의회의원 선거 후보자의 유세소리가 한창이던 지난 3월 18일, 한표의 투표권 행사도 하지 못하고 지방의회 개원도 보지 못한채 운명을 달리해 안타까움을 더하게 했다. 항상 우리 보은과 군민을 걱정했던 용운 박기종 옹은 후손들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지역발전을 위해 앞으로 교육사업과 문화 사업에 역점을 두어 추진하고 욕심을 부리지 말며 근면 성실한 자세로 고향발전을 위해 일할 것" 을 당부했다고 전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