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외면 중티리
자고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자기가 나고 성장한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중티부락은 성종시대 이조개국공신 남재의 칠세손 남충년이라는 분이 낙향남하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보니 산자수려하고 토질이 부드럽고 수맥이 풍부하므로 정착하여 생활을 이어온 것이 부락설립의 유래라 전하여 온다.그러므로 부락의 역대는 약 400년이 넘는 것으로 본다. 부락이름을 중티라 부르게 된 것은 승지곡(僧址谷) 승지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즉 중터라는 어음이 중티로 변칭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부락은 보은에서 북으로 약 3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의 힘찬 일맥이 서북으로 뻗어 내려와 칠봉산을 마련하고 그 선봉인 시루봉이 부락을 향하여 고깔을 쓴 모양으로 자비로이 지켜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락을 노증수불이란 풍수학설도 있다.
시루봉 하록에는 옻샘이 있고 부락 뒷산에는 피부병에 잘 듯는 약수가 유명하다. 앞뒤로 푸른 산이 연이어 있는 그 사이로 한강 상류의 맑고 푸른 물이 시내를 이루어 구비쳐 흐르고 있다.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삼아 인심이 소박하고 애향심이 돈독하며 친절과 신망 그리고 참을성 있는 주민들은 부락을 가꾸고 지키고 사랑하며 자손 대대로 영원할 것이다. 1991년에 정부시책에 의하여 도로 확포장이 잘되어 교통이 편리하고 생산품의 출하가 원활하게 되었다.
우리 주민은 부락을 상징하기 위하여 자연석에 중티리라 각명하여 영원히 지키리라. 끝으로 고향을 지키고 그리는 마음으로 외지에서 성원하여 주신 형제들에게 감사하며 사업 추진에 협조하신 애향심에 주민 일동이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1991년 12월 건립한 중티리 마을자랑비 전문
중티리(中峙里)의 유래
보은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대바위 가든에서 575 지방도를 타고 산외면 봉계를 지나 8번 군도인 구티고개를 넘어 길탕리에서 새로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사방이 온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산밑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3개의 자연마을이 나타난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마을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도로 양옆으로 웃말과 아랫말로 나뉘고 8번 군도와 새로놓인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양지말 등 3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자랑비에 나와 있듯이 중티리는 조선 성종 때 개국공신 남재의 7세손인 남충년이 낙향하던 중 산수가 수려하고 수맥이 풍부해 토양이 양호한 곳을 발견했다. 이곳이 산 가운데 우뚝 선 형세를 하고 있어 중터라 이름짓고 이 곳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산외면 중티리가 생긴 것은 약 400년전이다. 이 당시 지명은 중터. 이 중터가 중티로 변해 현재 중티리라는 행정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중티리의 현황
중티리는 본래 보은군 내북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웃말(궉말), 아랫말, 양지말 등을 포함해 산외면에 편입됐다. 산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산대리, 서는 내북면 적음·성티·두평리, 남은 길탕리, 북은 이식리에 접하고 있다. 중티리는 3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이 3개의 자연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마을자랑비의 내용만으로도 중티리가 명당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시루봉 아래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의 모습 자체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모습이다.
마을 중간에 8번 군도가 지나가고 양지말과 웃말을 이어 길탕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개설됐으며, 보은∼내북간 국도 19번 확포장 공사로 중티리에 새로운 변화를 오고 있다. 마을 주변 산에는 명당터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묘지가 많아 주변환경을 저해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남다른 동네이다.
중티리는 지난 99년 39가구 11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35호에 9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중티리도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의 절반이상이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대부분의 노인회원들은 3년째 경로당에서 회비를 갹출해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중티리는 대부분 논농사와 밭농사로 고추와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시루산 산제와 탑고사 사라져
중티리에는 마을사람들이 수호신처럼 받들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시루산이다.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시루산 중턱에는 큰 지네가 살고 있었는데 이 지네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고 성황당을 세워놓고 정월 보름날과 칠석날에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예전 제사를 지냈던 산제당 자리와 큰 참나무는 지금도 남아있지만 시루산은 중티리의 수호신으로 마을주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또한 웃말에서도 마을 안녕과 주민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탑(탁)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고 박정희 대통령시절 미신타파 정책으로 인해 지금은 제를 올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화목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
마을의 모든 살림살이는 부녀회에서 도맡아 하고 있다. 매년 고물수집 등 폐물을 모아 얻은 수익금에다 회비를 모은 돈을 합쳐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당 유류비를 지원하고 효도관광도 시켜드리는 등 상경하애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경로효친 사상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마을 애경사시 모든 주민들이 십시일반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등 마을 주민 모두가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특히 애사시에는 외지에 나가있는 자녀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일을 하는 등 출향인들과도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농로 확포장·경로당 운동기구 설치 숙원
중티리를 흐르는 속리천 제방 축조와 보은∼내북간 국도 19호선 4차선 도로 확포장 공사로 인해 많은 농경지가 잠식되었으며, 보상가를 제대로 못받았다고 아직도 서운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중티리에는 두 가지 마을 숙원사업이 있다. 하나는 경로당에 운동기구 및 치료기구를 비치해 놓는 일이다.
노인들이 방안에서 간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운동기구와 온열찜질기 등 간단한 치료를 할 수 있는 치료기구를 구비해 건강을 지키며 편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시루산 밑에 있는 농경지로 가기 위해 속리천에 교량을 건설, 지난해 준공을 했지만 부지 해결이 안돼 농로를 만들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로 또한 비좁고 비포장으로 농사를 짓는데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이 주민들 여론이다.
경운기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농로를 하루속히 확포장해 마을주민들이 편안하게 농사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되었으면 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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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여기서 남제공의 7세손으로 표현한것은 맞는것입니다.
예컨데 미국이민 1.5세 하면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이민했으면 1.5세인것으로 아버지가 포함된것입니다. 양지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