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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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에서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2.06.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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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오늘 하루는 나를 위해 줄 수 없어요?”
남편이 허튼 짓을 했나보다 싶어서 많이 바쁜 와중에도 노트북을 덮었다. 긴 말 필요 없이 우리는 한 시간 후, 가끔 만나던 거기서 만났다.  
둘이서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났다. 고속도로를 피해서 남으로, 남으로 핸들 방향을 잡는 후배도 나도 이렇게 무작정 떠나기를 좋아한다. 몇 년 전만해도 가끔 이런 짓을 했으나 지금은 내가 바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많이 자제하는 후배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정서가 비슷하다. 
황간을 지나 추풍령휴게소를 들어가기 위해 추풍령 IC로 진입했다. 지체부자유 장애를 가진 내 다리 사정을 알고 구름다리 한번 보고 나 한번 보며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 채고 내가 앞장섰다. 커피 한잔 씩 들고 하나 둘 오르고 쉬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오늘하루 여기 계단에서 다 소비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움직였다.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표현과 구름도 쉬어 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민정 엄마는 오늘 저기 황학산 중턱에 구름도 울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알면서 뭘 물어요, 난 언니가 언제 봐도 밝은 모습이 참 부러워요, 언니는 저 산허리 구름이 춤을 추는 것 같죠?”
“아니, 포석정 같아요, 흐르는 구름위에 술잔 띄우고 싶어요.” 했더니, 곧바로 고, 고우! 하더니 오르던 계단에서 돌아서며 서둔다. 그렇게 우리는 경주로 향했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신라시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던 연회장소 포석정이다. 찾아 올 때의 기분, 그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썰렁하고 메마른 상황이지만 내가 먼저 정완영의 시 ‘을숙도’를 읊으며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경주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네.” 우리는 상상으로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포석정은 원래 중국의 왕희지가 친구들과 즐기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본 따서 만들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한 수 읊어야 한다. 미쳐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했단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유희인가. 아마도 오늘은 우리 둘의 유희라기보다는 포석정 수로에 눈물의 잔을 띄울 것 같다. 이미 이 여인의 긴 눈이 촉촉하다.  
“남녀 평등요? 웃기지 말라구해요, 남자는 저 하고 싶은 짓거리 다하면서도 가족 생각, 가족 위한 헌신은 여자들 몫이 되는 걸요.” 
잠시 먼 산만 바라보다가 다시 꺼낸다. “그 때는 큰아들 결혼 날 받아놓은 상태라서 이혼 할 수가 없어 참고 넘어갔죠. 결혼 시키고 나니 딸이 걸리잖아요, 부모가 이혼하면 딸에게는 아주 큰 악영향이 될 것 같아서 또 참았지요. 그렇게 두 녀석들 다 제 가정 이뤄서 나가고 나니까 온 세상이 허허벌판 같았어요. 황량한 벌판에 그래도 아무도 없는 것 보다는 밉든 곱든 옆에 있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를 더 비참한 바보로 만든 것은 그이더라구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손수건만 적신다. 
“여보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지난 날 껄끄러운 문제들 다 잊어버리고 우리도 새 출발 하는 의미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해서 이 여인은 지난 봄, 진짜 행복하게 사이판까지 다녀왔단다, 그런데 어제 한 여자가 찾아와서 사람이 어찌 그리 어리석냐고, 아들 딸 결혼 시키고 나면 아내가 떠날 거라고 했다면서 기다리라고 했단다. 왜 못 떠나느냐고, 허수아비 남자 무슨 미련이 남느냐면서 둔하다고 거듭 강조하더란다. 
골프장 간 남편에게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나를 영원히 볼 수 없을 거라는 협박으로 불렀단다. 남편의 말은, “옛날에 사귀던 여잔데 또 자꾸 찾아오는 걸 안 만나주니까 심술부리는 거여.” 하면서 확실하게 둘 관계 매듭지은지가 언젠지도 모른단다. 자기를 믿어 달라고 하더란다. 그 말 듣자마자 내가 휴! 하고 안심이라 했더니 나를 이상타는 듯 바라보면서 “언니는 민정이 아빠를 아주 믿는군요.” 한다.    
“과거사 다 잊고 여행 떠날 때, 그때 기분으로 돌아가요, 무조건 믿어요, 내 생각은 그 여자가 오히려 남편의 새 출발의 뜻을 더 믿도록 해 주었네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라는 속담 알죠? 한시름 놓았어요, 실은 아침에 통화하고 걱정 했는데 이제 홀가분해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불과 몇 십분 전의 표정과는 확연하게 다른 밝은 표정으로 배고프다면서 밥 먹으러 가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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