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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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 이장
  • 양승윤/회남면 귀향인
  • 승인 2022.02.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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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얘기다. 두 분 선배 교수님이 계셨는데, 남자 선배님은 활달하시고 여자 선배님은 전형적인 여교수님이셨다. 학기 초 학사일정을 논하는 단체 여행지에서 점심을 각자 해결하시라고 학과를 통해서 한 분에 만 원씩 나눠드렸다. 여교수님이 일찍 귀가하셨는지 어쩐지 점심식사를 여러 교수님들과 같이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돈 만 원이었다. 여 교수님은 학과로 내려온 자신의 점심값을 받지 못하셨다고 서운해하셨다. 몇 년이 지나도록 되풀이해서 같은 말씀이셨다. ‘오뉴월 모닥불도 쬐지 말라면 서운하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이래서 나온 것 같다.
우리 농촌이 점차 쇠락한다는 우려스런 뉴스가 자주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농촌에 내려와 살면서 가장 폐부에 와 닿는 것은 저녁 6시만 되면 온 동네가 절간처럼 적막함에 빠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없어서다. 개 짓는 소리와 가로등 불빛이 마을을 지킨다. 그러니 농촌은 점점 더 고령화로 향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노인 주민들이 한 분씩 한 분씩 사라진 뒤 우리 농촌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노인들만 남아 있는 농촌을 위하여 정부는 기초지자체인 군 단위를 통하여 다양한 복지정책을 내놓고 있다. 말단 행정조직인 면의 하위조직은 리(里)고, 이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농어촌과 산촌을 살리는 일에 이들 이장님들이 파수꾼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장은 주민들의 말초신경을 지키는 공인이다. 말초신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고 마을은 이에 따라 점점 피폐해 갈 것이 분명하다. 말초신경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고른 영양과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고, 생활 주변의 평온함과 안정감 등 정서적인 면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모든 주민이 똑같은 주민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연말에 우리 마을에서는 40킬로의 가래떡을 만들어 열다섯 가구가 나누었다. 마을회관에서 아껴먹고 남은 묵은쌀이다. 방앗간에서 이장님이 실어온 떡은 이장 댁으로 가지 않고 곧장 마을회관으로 들여놓았다. 회관을 지키던 세 할머니에게 가구별로 나누실 것을 주문했다. 이장님은 저울을 가져와서 공평분배를 도왔다. 제법 묵직한 가래떡 보따리를 받아든 주민들은 모두 저울 이장님에게 고마워했다. 우리 마을은 그래서 집집마다 훈훈한 연말을 보냈다.
마을마다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몇 가지 소소한 일거리가 있다. 적지만 일정한 수고비가 통장에 들어오므로 일하고 싶어하는 주민들이 여럿인데, 할머니들이 많다. 밭일이 없는 농한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이장님은 마을 회의를 열어 모든 자료를 펼쳐놓고 상의를 하지만, 마을회관 주변의 작은 일거리는 할머니들을 따로 회관으로 나오시라고 해서 할머니들끼리 순번을 정하도록 권유한다. 해결이 안될 때만 이장이 나선다. 누가 봐도 공평한 일 처리 같다.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입장은 똑 같지 않을 게 분명하다. 연로한 주민들을 찾아가며 설득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도 유쾌한 일도 아니다. 그래서 이장님은 항상 바쁘다.   
인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 중 굵은 갈래의 하나로 실크로드라는 게 나온다. 비단길이다. 그 비단길의 중추가 당(唐)나라 수도 장안에서 이탈리아반도 동북단의 베네치아까지다. 경부고속도로 치자면 서울-부산인 셈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기점으로 수많은 고속도로가 지선을 만들며 뻗어 나간 것처럼 장안에서 고려 땅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포구 벽란도(碧瀾渡)로, 일본 열도로 연결되었다. 고려인삼이 드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 때도 이때다. 베네치아를 경유해서 유럽 시장에 비단과 갖가지 진기한 동방의 향신료가 소개되었다. 후추는 한동안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하여 거래되었다.
전 유럽의 장사치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세익스피어 대표작의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식 발음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공국(公國)으로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였다. 사람과 부(富)가 넘쳐흘렀다. 당연하게 부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넓은 땅을 소유하여 궁전같은 저택을 지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은 부자나 가난한 자 누구에게나 ‘똑같은 규격’으로 협소하였다. 오늘날 이곳의 섬들은 모두 다리나 운하로 연결되었다. 신기하게도 이곳에는 자동차 도로가 없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붙잡히면 벌금을 문다. 누구나 예외없이 걸어다닌다. 오늘날 유럽의 5대 경제대국인 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논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로 네 번씩이나 월드컵을 들어 올린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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