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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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초록 앞에서
  • 김종례 (시인, 수필가)
  • 승인 2021.12.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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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강물은 쉼도 없이 흘러흘러 엄동설한이 왔나 싶었는데, 아차 싶은 시간 앞에서 조명처럼 내려앉는 마지막 석양을 바라본다. 어지러운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깊은 강물위에 저마다의 상흔들을 띄워 보내는 시점에서, 오늘은 한로삭풍 벌판에서 홀로 깨어있는 겨울초록을 만나본다. 겨울들판에서 초록거리는 가을보리밭은 매서운 눈보라를 맞으며 밟아주던 오리지널 추억도 생생하다. 불교에서도 고난도의 수행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 또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과정을 보리라고도 한다니, 정녕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혹독한 추위와 역경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는 춘화현상의 대표적 산물 앞에서, 달초쯤에 치렀던 잠깐의 병상생활이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는 순간이다.
 
  30년 전에 있었던 반년동안의 간병생활을 제외하고는, 참 감사하게도 그럭저럭 건강하게 살다가 갑작스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매일 방사선을 밥 먹듯이 쏘여가며 온갖 검사들을 다 마친 후, 두평 남짓한 공간에서 멀뚱멀뚱 결과를 기다리던 시간! 만감이 교차하며 모든 걸 다시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입으로는 감사의 찬양을 부르면서도 곁에 널려있던 행복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었나 보다. 빈 정원 나목에서 노니는 새 한 마리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던 병상생활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병증으로 발전하지 않았음에 감사. 두 번의 마취에서도 다시 깨어나게 하셨으니 감사. 연이은 금식으로 속을 비운 후에 삼키는 한 수저의 묽은 죽은 천상의 맛나였으며, 영상으로 오묘하고 복잡한 오장육부를 들여다보니 이제껏 살아 온 것도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목줄로 인하여 침만 삼켜도 느껴졌던 거북했던 이물감, 5일만에 제거하고 처음으로 물 세수했을 때의 그 상쾌함. 인생 삼중고의 상징 헬렌켈러의 감사의 조건들이 눈물나게 하였다. 병원에 가면 의사님의 한마디 말이 생명의 판결문이다. <퇴원하셔도 됩니다>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삶의 현주소가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마치 단기 생애연수를 무사히 마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한 달 먼저 들어와 동병상련하던 옆자리 아주머니는 이미 성자가 되어 버렸다.

  병실에다 미안한 마음을 남겨두고 퇴원하던 첫날, 서울의 겨울풍경은 또 얼마나 신선하고 경이로웠는지 모른다. 이파리 한 장 없는 가로수나 미세먼지 자욱한 야토빛 하늘조차 반가웠으며, 열흘만에 만난 햇살 한줌은 3차 백신보다도 강력한 면역력의 직사포였다. 시골로 귀가하던 날에 수정처럼 반짝거리며 마중해 주던 소소한 일상들! 늘 무덤덤하여 무슨 빛깔인지도 얼마나 값진 보석인지를 잊어버렸던 귀하디귀한 흑진주 그것이었다. 이렇게 난감한 굴레에 갇혀 버리고서야 <한번만 더>를 외쳐대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종종 상심과 고해도 주시어 현존안락에 잠든 나를 깨우시고, 자만으로 얼룩진 내면까지 말갛게 투영시켜 주시니, 이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일찍이 파스퇴르는 말하였다.‘행복이란 감사의 여지가 있는 마음에만 찾아와 미소 짓는다. 분수에 맞는 안분(安分)과 현재에 자족(自足)함으로써, 부정적인 결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해박의 길로 가라.’고 하였다. 감사가 없는 삶은 행복하기 위하여 마련하였던 흑진주를 잃어버린 꼴이라 할까? ‘감사는 감사의 조건을 불러 모으고 불평은 불평의 꼬리를 불러 모은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내 삶에 행복의 조약돌이 무수히 널려 있어도, 그 영혼에 감사함이 없다면 안개 속에 핀 억새꽃에 불과하다. 감사와 행복의 관계는 영원한 상호동반 평행선이기 때문이리라.
 
  지금 우리는 2년간의 정체불명 바이러스로 기진맥진해져서, 메케한 미세먼지라도 실컷 마시고 싶은 갈증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삶의 푯대나 인내의 마지노선도 허물어져 모든 게 주저앉는가 싶겠지만, 전광석화처럼 사라지기를 기원함도 불투명한 현실이 되었지만, 그래도 감사의 흑진주만은 잃지 말고 한 해의 강을 건너야 할 시점이다. 소빙하기 강추위에 단련된 단풍나무가 명품악기를 만드는 것처럼, 고난도 유익이라 가르치는 가을보리 겨울초록의 강인함으로, 새 일출이 떠오르는 지평선 끝에서 반짝이는 희망등대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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