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 인생 속리산 콩나물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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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인생 속리산 콩나물 아줌마
  • 보은신문
  • 승인 1997.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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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58세)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에서 콩나물 아줌마를 모르면 간첩이다. 내속리면 사내리 김영오(女 58)씨는 일명 「속리산 콩나물 아줌마로」통한다. 괴산군 증평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속리산으로 들어온 것이 김씨의 8살 먹던 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무작정 여동생과 함께 속리산으로 들어온 것이 올해로 50년을 맞는다. 50년전 어머니의 수입은 하루하루 밥먹고 사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가정형편의 어려움 때문에 김씨는 15살 때 13살 많은 남편을 만나 신혼 살림을 시작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었다. 서로 어려운 형편속에서 만나 신혼살림을 시작했어야 했고 먹고 살기위해 화전(火田)을 일궈 입에 풀칠하기가 바빴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때 집에 들어와 콩나물 시루에 물주기를 시작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처음 콩 한말을 2천원에 구입해 1년 동안 콩나물을 키워 내다 팔기 시작해 현재는 1년에 60가마니 콩을 구입해 콩나물을 생산해 속리산일대 상가와 음식점에 공급하고 있다.

남의 논밭을 일구면서 모을 수 있는 재산이라곤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그 당시에 김씨에게 콩나물을 키우는 것은 유일한 몫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번은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 구입한 콩이 싹을 튀우지 않아 손해를 본적도 있었으며 속리 상해 다른 일을 찾아보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다키운 콩나물을 리어커에 싣고 속리산일대 상가를 돌며 요령( 鈴)을 흔들면 소리를 들은 손님들이 모여들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는 김씨는 자신과 남편이 고지식하고 욕심이 없어서인지 장사가 안되는 날 물건을 팔기 위해 애걸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장사가 잘될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지」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게 40년을 넘게 한가지 일만 꾸준히할 수 있었던 것이 유일한 비결이었다. 집이 없어 단칸방에서 셋방살이할 때 1남2녀를 낳아 지금은 큰딸은 시집가고 막내 아들이 충북대학 2학년을 다니다 휴학해 군입대를 했다.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살게되자 갑자기 찾아온 남편의 위암소식은 김씨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1년동안 투병을 하는동안 김씨는 혼자 콩나물 리어커를 끌어야 했고 남편의 약값 충당은 김씨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1년 투병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남편을 보내고 혼자 콩나물을 키우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었다. 남편과 둘이하다 혼자 콩나물을 키우면서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자식들의 성장이었다. 가정형편을 알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준 막내아들은 어머니의 고생을 져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콩나물 장사를 하게끔 힘을 주었다.

「TV에서 농약을 사용해 콩나물을 키운다는 보도를 접할 때 가장 속이 상했습니다. 장사는 물론 안되고 곱지 않은 시선이 싫었습니다」고 말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이 키운 콩나물을 사주었던 단골 때문에 장사를 계속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콩나물 시루에 자동으로 맑고 신선한 물을 주는 장치를 만들어 조금은 콩나물 키우기가 쉬워지고 많은 콩나물을 키워 법주사를 비롯 상가, 식당에 공급하고 있지만 옛날 밤낮으로 콩나물 물주어야 했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는 김씨. 최근 자전거를 배워 콩나물을 싣고 속리산 일대를 돌며 김씨가 흔드는 요령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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