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벨내기”의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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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벨내기”의 실화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20.11.0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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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또시에 있는 풍국신사(豊國神社)는 조선민족에게 한없는 고통을 안겨준 풍신수길의 사당이다. 길건너 편에는 “이총(耳塚)공원”이 있고 공원 한 모퉁이에는  소위 “귀무덤”(耳塚)이 있다.
임진왜란시 왜군에게 살해된 조선인들의 시신에서 도려낸 귀와 코가 폐기되어 묻힌채 420여년 동안 원수의 전공(戰功)을 빛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일인들의 놀이터(공원)에 있어서 애절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보도에 의하면 최근에 처음으로 일본인 민간단체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조선에 사과해야 한다는 작은 목소리도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총의 기막힌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즉, 임진왜란때 풍신수길은 왜군들에게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도려내어 ‘전리품’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운반중 썩지 않게 소금에 절여 넣은 독이 일본에 도착하면 숫자를 확인하여 장수들의 공적에 올리고 일본각지를 돌며 전시도 했다. 그리고 쓰레기로 폐기한 것을 한데모아 묻은 것이 자그마치 12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고 코와 귀를 멸치처럼 염장을 해서 가져갔다니 그자들이 과연 사람인가? 새삼 “왜놈”들의 잔인함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무덤이 귀무덤(耳塚)인지 코무덤(鼻塚)인지는 모르나 같이 섞여있어서 ‘이비총(耳鼻塚)’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처음에는 오른쪽 귀만 짤라서 보냈으나 일본에 도착한 내용물 중에는 왼쪽 귀도 섞여 있어서 숫자계산에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저 원숭이같이 생긴 “풍신수길”은 사람마다 하나 밖에 없는 코를 짤라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풍신수길이 1597년 6월 14일 대마도주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우끼다”와 “소서행장”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도록 명령한 사실, 그리고 코를 수령했다는 ‘영수증’들, 풍신수길이 1597년 9월 13일자 코를 보낸 부하장수 시마스 다다도요에게 명나라 군사 269명에 대한 코를 수령했다는 사실과 함께 전공을 치하하는 내용의 서한 등 사료에서 당시 정황을 파악할 수가 있다.
임진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도망(피난)을 가자, “왜적떼”들은 더욱 화를 내며 조선의 전 국토를 종횡무진하며 약탈과 파괴방화로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이런 왜족의 잔인성은 최근세 중일전쟁때 또다시 나타나 악명을 떨쳤다. 당시 난징에서만 30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하였고, 일본군 소위 2명(向井敏明, 野田毅)은 중국인 포로 100명 먼저 목베기 시합을 경쟁적으로 살인놀이까지 벌였다.
종전 후 재판에서 그들은 목베기시합에 관한 신문보도(大阪每日新聞, 東京日日新聞) 내용은 “소설”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 유족들은 극우단체의 재정지원을 받아서 목베기시합을 보도한 위의 두 신문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소송까지 했으나 패소했다. 전시에 저지른 일본의 이웃나라들에 대한 만행은 이를 전쟁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물론 인간의 잔인성은 전쟁때 나타난다. 인간이 동물계의 일원이지만 유일하게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 양심은 개인양심과 집단양심으로 나타나는데 전시에 집단양심은 무서운 집단광기로 변한다.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를 선택한 당시의 독일국민들도 집단광기에 휩싸여 유태인 600만명을 죽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전쟁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는 것이 본래 그런 혈통을 가진 사람이나 민족의 광기가 전쟁때 나타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필자가 만나본 충청도 어느 산골의 연로한 노인이 이야기 끝에 농으로 “코벨내기하자”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왜적들이 저지른 이비총과 관련이 있는 실화임을 느꼈다. 일본에 대해서는 ‘과거사를 절대로 잊지 말고, 국화속에 숨은 칼을 특히 조심하라’고 저 이비총에 묻힌 우리의 선조 영령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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