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노래, 시월애(十月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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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노래, 시월애(十月愛)
  • 김종례(시인, 수필가)
  • 승인 2020.10.2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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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국화향 깊어가는 가을의 정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뇌파에 쌓여만 가던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회복을 염원하며, 피멍들게 달려온 한해가 아닌가! 어김없이 찾아온 시월이 더욱 찬란하고 빛나게 안겨오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같이 가을바람 한줄기가 풀잎을 누이고, 희미한 달빛이 연못을 비추는 날이면, 우리 삶의 거울 같은 달, 시월의 사색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깊은 환부까지 달래고 위로해 주던 달 시월이 유성처럼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리라.
 장독대 옆에 소담하게 피어난 노오란 토종국화, 보랏빛 송엽국, 아담한 울타리를 친 골드메리향이 가득했던 작은 정원의 가을은 봄, 여름보다도 풍성하였다. 고요히 퇴색되어 가는 꽃잎 앞에서 사색에 잠기노라면, 그 무엇보다도 꽃처럼 진솔하고, 벌처럼 성실하게 살아감이 최선책임을 알게 된다. 공감과 관대함만이 모두를 살려내는 소통의 지침임을 깨닫게 해주는 가을정원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제 발등위에 분신을 우수수 쏟아내며, 이 또한 사라질 것이 분명한 것이다. 봄날의 소망의 부활. 한송이 꽃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한 줌의 분토가 되어야 할 것이기에. ‘시월의 산들바람 앞에서 한그루 영상초가 되어가는 것이 어찌 꽃뿐이랴!’화무십일홍의 꽃잎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이유이다. 
 논마다 탈곡기소리 요란스럽고 밭마다 대추 따는 손길이 분주했던 시월의 들판을 내려다본다. 장황한 말이 무색하리만치 눈빛에 가슴에 충만하게 안겨오던 황금들판도 어느새, 출항 준비를 마친 만선 한척 떠있는 빈 바다가 되었다. 뱃머리마다 고동소리 갈 길을 재촉하고, 귀환의 약조를 알리는 풍물소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예까지 따라오느라 무거워진 우리네 삶의 멍에도 저 빈들처럼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밭곡식처럼 익어가는 우주의 섭리를 소유할 수 있으리라. 힘들었던 한해의 눈물조차도 책갈피 은행잎처럼 고이 간직하고 싶은 달이 시월이었기 때문이리라. 
 예년보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올해도 채색의 붓을 치켜든 가을여신이 단장을 시작한 앞산을 올려다본다. 아마도 오곡백과와 잘 익은 포도주 항아리를 준비하시어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려나 보다. 한 해 동안의 갈증과 옥조임을 치유해 주시고자, 메마르고 타들어가던 인간 군락에 평화를 주시려나 보다. 모두의 가슴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오색찬란한 단풍잎을 물들여서,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 한잔의 축배를 나누어 보라는 듯이 ~ ~
 시월의 바람에도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본다. 꽁꽁 얽혀있던 매듭의 앙금을 풀어내느라 시시각각 광대놀음 질펀하게 벌이는 중이다. 아무도 못 듣던 내 마음소리-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허공을 향해 내지르던 그리움의 노래이다. 몸부림치며 토해내는 누군가의 고독한 울음보- 텅 빈 가슴을 위로해 주는 공지혜의 기도문 자유의 노래이다. 나도 바람처럼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낙엽의 축제에 살풀이 한마당으로 어울려 보고 싶었던 시월이었다.
 우리들의 가을이 자꾸만 깊어만 간다. 바라보는 곳마다 신의 눈빛과 마주치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신의 음성 들려오던 계절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신록의 녹음방초 아래서 다가 올 피안의 가을을 어찌 감지할 수 있었으며, 푸르렀던 젊은 날에 어찌 서서히 다가오는 노인삼반을 예측할 수 있었으랴. 차갑기만 한 시월의 달빛과 별빛인데도 왜 따스히 느껴오는지도 미처 몰랐음인데 말이다. 어느 무명시인은 ‘시월에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손짓하도록 아무도 그리워하지 말자, 마른껍질로 굳어가는 외로움의 본질을 끌어안고, 하나 둘 이파리 떨구는 가을나무가 되어라’고 노래하였다. 가을을 노래한 수많은 이들의 공통 문구에도‘시월은 모든 걸 우주섭리에 맡길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달’이라고도 적혀있다. 시월애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들이라 할 수 있겠다.
 우주의 공자전도 노곤해졌는지 덜커덩 쿵 비틀거리며 11월을 마중하는 시점에서, 우리 모두 우주의 기와 가을의 정취와 하나가 되어, 바이러스 미로에서 속히 벗어나기만을! 이 아름다운 계절을 구름에 달 가듯이 초연하고 충만하게 보내기만을 기원해 본다. 날개를 접는 철새의 마지막 귀환처럼, 만월을 꿈꾸는 초승달 처음의 마음처럼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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