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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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장미
  • 김종례 (시인,수필가)
  • 승인 2020.09.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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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복더위가 언제 왔다 갔느냐는 듯이, 붉은 장미는 언제 피었다 졌느냐는 듯이,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지는 9월이다. 세 차례의 태풍을 거치면서 작은 홍수에 지쳐버린 작은 정원을 배회해 본다. 집을 짓고 어언 십여 년, 일상에 쫓겨 생각에 쫓겨 마음을 주지 못했던 작은 정원에는, 터줏대감으로 사랑을 받아 온 장미넝쿨이 시간의 무게를 이고 서 있다. 맥을 따라서 뜸놀이를 하던 열정의 흔적들을 제 몸에 칭칭 감고서는, 잔인하게 독이나 뿜어대는 요즘이다.
 그런데 초가을 하늬바람이 넝쿨 사이를 스쳐가던 정오였다. 무언가 살짝 흔들리며 눈 마주치므로 촉수를 곤두세우며 걸음을 옮겨 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갓 피어난 연핑크 장미 세 송이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이꽃저꽃 꽃씨를 우수수 뿌리며 제 얼굴을 다 지워버리는 사색의 시즌에, 숨죽이며 피어나 바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희미한 추억의 필름을 돌리는 넝쿨 아치에 핀 늦장미 세송이는 6월의 잔영이라 하겠다. 블루문처럼 기품이 있거나 집안 가득히 향기를 채우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은 연핑크 늦장미가 아프리카 기아의 눈망울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무성했던 잎들조차 본연의 윤기 다 거두어내며, 제 흔적을 흘흘 벗어 던지는 이 추풍지제에, 가슴에 곰삭이던 미련을 연한 울음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예쁘게 꾸미지 않아도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청순한 향기를 품는 이름 모를 소녀를 닮았다. 넝쿨 옆을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법의 진한 향기 대신에, 이 어려운 시대에 웃음을 잃은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주려고 피어났나 보다. 젊은 시절에 얼기설기 얽혔던 수많은 사연을 다 풀어내지 못해서, 서럽고도 푸르렀던 내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에 시 한 구절 읊조려 보는 순간이다. ‘아, 너도 이제야 피었구나. 한여름의 비바람과 태풍, 온갖 풍파 다 이겨내고 추분을 지나는 구월의 어느 날, 안으로만 곰삭히던 속내를 뒤늦게 터뜨려 보는 하소연이구나. 고비사막 언덕위에 핀 에델바이스도 아닌 것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우후죽순도 아닌 것이, 추억이 깊어가는 계절의 고갯마루 언덕에서 한줄기 영상초로 흔들리누나. 내 가슴 심지에 연한 메시지를 꽂으며 작은 울림으로 다가오누나!’
 花香千里行(화향천리행)人德萬年薰(인덕만년훈)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의 향기를 멀리멀리 전해주는 숨겨진 인재와 천사들이 참 많다. 숨어서 피었다가 소리 없이 가버릴 작은 정원의 연핑크 늦장미처럼 말이다. ‘먼 이국나라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후 안구를 기증한 외국인 노동자’‘전신장애를 갖고 있는 하숙집 딸과 결혼식을 올린 모 대학의 무명교수’‘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뇌종양 수술비용으로 1년 하숙비를 흔쾌히 내놓은 시골 태생의 대학생’‘초임발령부터 정년퇴임 날까지 먼 낙도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보살핀 무명교사’등등. 진정 이들이야말로 절망하는 이들에게 천연 향수를 무지개처럼 띄워주고, 저 늦장미처럼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져버린 이들이 아닐까. 이런 기적같은 소식을 접할 때마다‘나는 과연 내 인생을 잘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천태만상 많을 테지만, 그 중에 가장 바람직한 대답은 아마도‘내 뇌는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오늘 우연하게 발견한 늦장미 몇 송이를 바라보며, 그동안 침울했던 얼굴도 오랜만에 환하게 밝아지고 내 전두엽에도 좋은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이다. 점점 완연해지는 가을빛에 제 본연의 윤기를 거두는 장미 잎새 사이에서 작은 사랑의 노래가 들리기 때문이다. 평화, 깨달음, 소망까지 안겨주며 마음의 여유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고 절망하는 순간에도 진정 마지막처럼 진지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며~~, 다 끝난 줄 알았던 삶의 기회도 다시 찾아 올 것이라는 소망의 매시지 말이다.
 그다지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마음의 꽃은 피울 수 있노라고 격려도 아끼지 않는 연핑크 늦장미 세송이가 참 사랑스럽다. 오늘 너를 바라보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 본다. 나와 우주가 하나인 것을 알게 해주는 연핑크 늦장미 세송이! 하늬바람에 묻어온 가을초록이로다. 정녕 작은 우주로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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