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足不辱지족불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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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足不辱지족불욕
  • 소설가 오계자
  • 승인 2020.09.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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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시절, 산천의 나뭇잎들이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는 신호로 유유자적 스며드는 황금빛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쯤이다. 가을소풍으로 갔던 어느 산사에서 또래 같기도 하고 대학생 정도의 연령대로 보이는 승복 입은 청년들이 앞마당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담 너머로 보았다. 우리는 셋이서 킥킥거리며 출입금지 팻말을 못 본 척 뒷마당 쪽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갔다. 그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이라고 생각하니 호기심은 더 강하게 설렘으로 파고들었다.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여는데 삐거덕 소리가 어찌나 큰지 놀라서 후다닥 댓돌에서 내려오다 친구가 넘어졌다. 간이 콩알만 한 그때 “뭬 그리 놀라는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하늘에서 내려다 본 부처님의 소리 같았다. 셋이서 손을 꼭 잡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아버지 같은 스님이 떡하니 뒷짐집고 앞에 서 계시는 게 아닌가.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 올만큼 궁금한 행자들의 강의실은 보고 가야재.” 하시며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눈에 띄는 것은 가지런히 놓인 앉은뱅이 탁자에 위에 누른 책과 벽에 걸린 액자뿐이었다. 액자에는 사자성어인 듯. 하지만 첫 글자 不과 끝에 글자 相만 아는 글자였다. 별 관심 없이 나오려는데 친구가 “저게 무슨 말입니꺼?” 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무신 말인지 설명해도 너거들은 모른다 마 그냥 가거라.” 그 친구가 그래도 설명해달라고 조르자 “헛된 것에 속아 넘어 가지 말라는 말인데 어떤 것이 헛된 것인지 너거들은 모른데이.” 하셨다. 관심조차 없이 알려고도 않고 수십 년 세월을 보냈다.
십여 년 전 경인년. 무위당 장일순님의 수묵 전에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이라는 책을 구입해 읽다가 낯익은 글귀를 본 것이다. 그 글귀는 바로 여고시절 행자들 공부방 몰래 보려다 들킨 추억을 불러왔다. 너희들은 설명해줘도 모르니 그냥 가라고 하신 뜻을 알겠다. ‘不取於相’불취어상 금강경의 한 구절이며 살면서 헛것에 속아 넘어 가지 말라는 의미라는 설명이야 가능하지만 해석보다는 무엇이 헛것이며 무엇이 참인지 분별이 더 어려운 소녀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노년기인 지금은 잘 분별하는가? 글쎄올시다. 생각하다가 책을 덮었다. 방석에 앉아서 자문자답을 해 보았다.
<무엇이 헛것인가?: 과욕이지. 즉 이룰 수 없는 욕망.> <지나치다 싶은 욕망은 다 버려야 하는가?: 버리려고 애쓸 것 없이 그냥 놓는 거야 놓으라고.> <과하다 싶지만 그 중에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도 있을 텐데?: 그것이 바로 쓸데없는 미련이여.> <나는 꿈을 먹고 살잖아, 꿈 없이 어떻게 살아?: 이룰 수 있는 꿈이니까 헛것은 아니지. 글을 써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은 비웠지만 솔직하게 유명작가를 꿈꾼 적이 있었다. 일간지에서 내 소설을 뽑아 주었을 때였다.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감히 꿈을 꾸었다. 허준의 일대기를 엮은 영화와 드라마가 실제와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아쉽다는 허준 박물관 관장님과 후손의 말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허준과 부친의 성함 외엔 모두가 실제와 다르다고 한다. 심지어 유의재라는 인물도 미상이다. 자료를 얼마든지 제공할 테니 소설을 엮어보라고 해서 마음은 한껏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가정사를 뒤로하고 소설에만 전념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 꿈도 내게는 헛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여건이 허락 되지만 내 능력이 모자란다. 판단력이나 표현력 모두가 떨어진 노년기상태임을 자신이 잘 안다. 내가 대단한 착상이라고 표현 하는 것이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식상한 글귀가 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염려 되는 것이다. 그래서 ‘不取於相’은 책장으로 옮겨놓고. 제 분수를 알면 욕된 일이 없다는 뜻의 知足不辱지족불욕을 마음에 담고 살게 되었다. 그저 신문사에 원고 마감일이 되면 일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쓴다. 제분수를 일자고 다짐을 하면서 욕심도 한보따리 버렸다. 버리면 따라오고를 여러번 반복하다가 확실하게 그 보따리(명예욕)는 버렸다. 참으로 묘한 것은 영혼만 고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이 평화롭고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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