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을 걷다가 효자 정재수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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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을 걷다가 효자 정재수를 만나러 가는 길”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0.08.1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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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길(31)- 보청천의 지천, 한중천으로 마을길을 걷는다
예전 장터가 섰다는 세중리 전경.
예전 장터가 섰다는 세중리 전경.

마로면 원정리 느티나무를 지나면 보리골이라는 동네를 만난다. 본래 보리골은 모동, 관리동으로 불리웠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관리동이라는 지명을 쓰다가 그후 현감의 전령문서에 관리동을 속칭 보리골로 착각하여 모동이라 썼던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 보리골에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보리를 1,000석이나 하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찌나 인심이 사나웠던지 이웃간에 왕래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중이 나타나 시주를 요구하니 부자는 이를 단호회 거절하며 중을 내쫓았다. 중은 돌아서며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와 돌을 없애면 쌀 1,000석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부자가 즉지 그 말대로 나무를 베고 돌을 치워 버렸더니 수년내에 부자는 알거지가 되어 마을 떠나게 되고 마을에서는 재앙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다시 나무를 심고 큰 돌을 갖다 놓으니 마을안이 잠잠해지고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속에 나오는 나무가 바로 원정리 느티나무가 아닌가 싶다. 이 느티나무가 서 있는 위치가 보리골앞 넓은 들녘에 위치해 있다는 것만으도로 이 전설속에 나오는 느티나무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듯 했다.
원정리 보리골을 뒤로 걷다보면 마로면 세중리를 만난다. 흔히 ‘세상의 중심’ 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지금은 마로면의 면소재지가 관기리로 변했지만 예전 조선시대 역마를 먹이던 역마촌, 마루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말을 관리하던 역마촌과 관리들의 숙식을 해결하던 ‘보통원(普通院)‘ 이 자리했던 곳이다. 나라의 중대사를 전달하기 위해 파발마를 관리하던 마루장터였던 이곳은 마로면의 말마(馬)가 바로 세중리에 있던 역마촌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 세중리에는 비석이 즐비하게 세워진 비석거리를 만난다. 이 비석거리에는 예전에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중 하나인 제경욱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조선 순조때 의사 칠원인 제경욱의 신도비로서 비문은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비 영의정 겸 영경면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심상규가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세중리에는 세중초등학교와 농협, 보건지소등 제법 많은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어 예전 마로면의 중심이었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세중리에는 아직도 4개의 말리라는 들이 존재하고 있다. 대추가 많이 심겨진 들이라해서 대추말리, 마당처럼 넓은 들이라해서 마당말리, 소때가 풀을 뜯는 들이라해서 소때말리, 이름과 위치가 불분명한 추자(?)말리등 4개의 말리라고 불리는 넓은 들이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마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 역마촌이 있을 때 장이 섰다는 장터자리에는 예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복잡했던 세중리의 모습이 연상되고 있었다.
이곳 세중리 마을은 마을뒷편에서 배산을 형성하고 있는 시루봉과 마을앞에는 한중천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상을 하고 있어 풍요롭고 온화한 마을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세중리를 떠나 한중천을 건너 갈전리로 향했다. 칡밭이 많이 있어 치랏골, 또는 갈전이라고 불리었다는 갈전리에 도착하자 삼형제봉이라는 삼두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마을 동쪽에 있는 봉우리가 셋이라 삼형제봉, 삼두봉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효자고개로 불리는 효자 정재수의 비석과 묘가 자리하고 있다.
1974년 1월 아버지와 함께 경북 상주 화서면 소곡리 본인의 집에서 약12 km 떨어진 충북 옥천군에 있는 큰집으로 설을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보은군 마로면에 있는 험한 고갯길인 마루목재(지금은 효자고개)를 건너야 했는데 그 당시에 고갯길에는 이틀전부터 내린 눈이 30m이상 쌓여 있었고 날씨 또한 영하20도 까지 내려갔던 상황에서 정재수 부자가 지나간 다음날 인근 마을 사람들은 눈 쌓인 고갯길에서 아주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부자가 동사한 상태로 땅에 움츠리고 누워있는데 아버지의 몸에는 아들의 외투가 덮여 있고, 아이는 아버지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였다고 한다. 술 기운이 있었던 아버지가 눈길에 쓰러져 못 일어나자 정재수군이 옷을 덮어주고 몸을 일으키려 애쓰다 결국 아버지와 함께 동사 하게 된 안타까운 일이 있던이후 이 고개를 효자고개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어 있어 정재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재 정재수군의 감동어린 사연에 효자 정재수기념관이 상주 화서면 본인의 모교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박진수 기자
<다음호는 마로면 갈전리와 변둔, 한중리로 이어 갑니다>

원정리 보리골 마을.
원정리 보리골 마을.
세중리 비석거리.
세중리 비석거리.
세중리 장터 표지석.
세중리 장터 표지석.
세중리앞 한중천.
세중리앞 한중천.
갈전리 삼두봉.
갈전리 삼두봉.
효자 정재수 비와 묘.
효자 정재수 비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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