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좋은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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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좋은 어느 날
  • 김종례 (시인, 수필가)
  • 승인 2020.06.2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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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가뭄 끝에 지난밤에 실비가 내렸다. 미세와 무더위로 창문을 모조리 쳐닫고 오래된 에어컨으로 지내던 중, 오랜만에 청명한 아침 햇살을 맞이하러 마당으로 나가본다. 생명의 지느러미 치열하게 토해내는 뿌리에게 혼신을 다해 자맥질하는 바람 좋은 날이다. 장미를 비롯하여 나리백합, 황금달맞이, 인동초, 으아리, 제라늄, 마가렛, 사피니아 등이 피어나 6월의 바람에 일렁거린다. 마치 조숙한 아이와 늦된 아이들이 어울려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듯이 꿈나래 가득한 6월의 정원이다. 5월이 흔들리는 가지들을 부여잡고 빼곡히 솟아나던 잎새들의 축제였다면, 6월에는 그 잎새 사이로 피어나는 꽃향기를 전해주는 바람의 축제가 있다. 무용해 보이는듯하나 의미를 창출하는데 결코 손색이 없는 존재인 바람에게 내게도 한 송이 꽃을 피워주길 부탁하며, 쥐똥나무 울타리를 지나 들판으로 향한다.
 들판 입구 하얀 집 울타리에는 넝쿨장미 백여 송이가 붉은 울음으로 매달려 있다. 올해도 호국영령들의 혼들이 생명의 불꽃으로 피어나 울분의 뜸을 뜨는가 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고뇌의 숲에 갇히는 서러운 6월이 아닌가! 처절하게 피어난 꽃잎 사이로 6월의 바람은 저다지 불어오건만, 남북의 사상과 이념은 아직도 독선적, 공격적이고 위태롭다. 들판에 들어서니 한 다발의 농작물과 들꽃을 피우기 위하여 우주와 바람과 뿌리가 열렬히 협연중이다. 작물들은 저마다 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며 보살피는 자에게 보답하고자, 폭염과 비바람과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중이다. 몸부림치며 액션을 멈추지 않는 뿌리의 신념이 하늘을 찌르고, 들바람의 열정이 물결치고 있는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서 태봉산으로 올라본다. 
 우주세포 어디쯤서 숨 가쁘게 달려온 푸르름일까. 질펀한 녹음방초 장막을 지은 숲에 서노라니, 온 몸이 진록빛 염색물에 함뿍 물이 드는 듯하다. 소음과 분주함으로 일관된 마을에서는 들리지 않던 바람의 노래가 온 숲을 채우고 있다. 아, 마스크 없이 숨을 쉴 수 있는 이곳이 축복의 전당인양, 바위에 걸터앉아 요동치는 시상의 나래도 펼쳐보는 순간이다. 내 전두엽 어딘가에 박혀있던 6월의 연가를 흥얼거리다가 잠시 쪽잠에 들었나 보다. 나비의 날개 짓으로 생겨나와 먼- 들판을 달려온 하늬바람이 편지 한 통을 안겨준다. 세월의 언덕길 삶의 가랑잎을 날려주며 오래된 아픔까지 치유해 주겠다며 다가온다. 나도 뇌파 안에 쌓인 삶의 진액을 모조리 쏟아내고 싶은 심정으로 바람을 안아본다. 생의 풀뿌리에 걸려서 흐르던 눈물위에, 삶의 돌밭에 넘어져서 흐르던 핏물위에 영혼의 묘약을 뿌려주는 6월의 바람을~. 정숙한 사랑의 경계조차 무너뜨릴 기세로 온 몸을 휘감는 바람의 축제에 몰입하였다.
 
 장자의 胡蝶(덧말:호접)夢(덧말:몽)에라도 취한 듯이 비몽사몽 깨어나 정상에 홀로 서노라니, 내 얇은 옷자락만 승장의 깃발처럼 펄럭거린다.‘마른껍질로 굳어가는 나의 본질은 원래 바람이었는데, 인간사에 잠깐 들려서는 가슴에 삶의 옹이들을 대못질해 가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자유롭고 통괘한 잠시의 착각으로 몸은 깃털처럼 가벼웁고 머리는 바이칼처럼 맑아졌다. 자유의 대서사시 같은 산바람을 남겨둔 채 하산을 재촉한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우리네 숨결처럼 늘 덧없고 정처 없는 바람이다.
저 아래 우리네 삶의 터전에도 위선과 분열의 눈물로 얼룩진 시대의 바람이 늘 심란스럽기만 하다. 내일이면 또 어떤 바람이 불어와 우리에게 안위를 주거나 곤궁에 빠뜨릴지~~ 늘 궁금하고 불안하다. 모든 이들의 가슴에 매듭의 앙금이 풀리고, 저마다의 가슴에 화합의 불씨를 피우는 맞바람이 불어오기를 기원해 본다. 금년 들어 무겁게 다가와 우리를 장학하고 있는 코로나 확산의 바람, 남북냉전 긴장의 바람, 경제나락의 돌풍들이 계절의 바람처럼 허허로워지기를~~ 속히 우주의 섭리를 지켜가며 무릉도원을 꿈꾸는 바람꽃이 활짝 피어나기만을 기원해 본다. 나도  만삭의 여인이 해산하는 울음보로, 대궁까지 시퍼렇게 전이되는 몸짓으로, 살풀이 한마당 두리둥실 풀어보던 바람 좋은 6월의 하루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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