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글쓰기를 꿈꾸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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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글쓰기를 꿈꾸는 시인
  • 보은신문
  • 승인 1997.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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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詩人
문학은 심연 길어 올리는 역사와 인간의 두레박
삶의 터전인 고향 대청호이야기 소설 출간예정
◇ 이관모 대표이사 : 요즘 근황은?

◆ 송찬호시인 : 시간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 같다. 5월말까지 원고 두 개를 끝내야한다. 여러 청탁원고들도 마감이 임박했는데도 지지부진하다. 그리고 표사를 부탁한 다른 저자의 시집원고도 아직 뜯어보지 못했다.

◇ 이 : 작업 형태로 보아 글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은데 전업으로써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 송 : 그게 모호하다. 전업이라 하면 우선 발표 지면과 책을 엮어낼 수 있는 출판 공간과 독자가 확보되어야 한다. 당연하게 작가로서도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꾸준한 글쓰기의 속도와 끈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게 있어 발표 지면의 어려움은 없지만 인세나 원고료가 현실적으로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내 글쓰는 속도는 느리고, (시집이 일만 부쯤 팔린 정도니)내 독자는 아주 제한되어 있다. 시만 쓰고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써야 한다. 그게 내 운명이다. 난 늘 행복한 글쓰기를 꿈꾼다.

◇ 이 : 내가 듣기에도 경제적 풍요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전업 작가는 소수로 알고 있다. 그만큼 작가들의 주변 여건이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 손치더라도 요즘 송시인이 쓰고 있다는 소설은 어떻게 돼 가는가?

◆ 송 : 지난 2년 간 아주 힘들고 더디게 나갔다. 거의 끝냈다. 까탈스러운 지문과 긴 호흡의 문체로 보아 많은 독자를 얻을 것 같지 않다. 더 이상의 얘기는 발표 후에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 조금 전, 시간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컴퓨터에 글쓰기를 의지하는가?

◆ 송 : 정갈한 원고지를 앞에 놓고 정성들여 펜으로 꾹꾹 눌러 쓰는 모습은 이제 추억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빠른 속도의 워드로 작업한다. 편집이나 디자인 분야에서도 컴퓨터 도움 없는 작업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제 컴퓨터와의 만남은 음악이나 미술에서의 그것처럼 문학에서도 무시 못할 영역이 되어버렸다. 나도 컴퓨터에 익숙하다. 그런데 그 『익숙하다』는 말은 그것을 다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다. 컴퓨터에 내 사유의 방식이 『젖어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컴퓨터는 비단 펜과 원고지 역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글쓰기 행위에 간섭하고 지배하려 한다. 가령, 쓰는 도중에 전원이 끊어져버리면 글의 중단뿐만 아니라, 내 사유의 흐름도 끊긴다.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늘 그것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일천한 내 문학적 상상력 때문만 아니라, 문장이 영혼으로부터 불려나오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 끈에서 호출되는 듯한 혼란스러움에서 오는 방법적 사유의 갈등도 있는 것이다.

◇ 이 : 무학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 그런데 독서와 글쓰기의 오래된 관습이 이제 기계에 언어의 고유한 기능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비워주어야 한다는 면에서 충분히 공감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 문화의 추세는 더욱 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 신문만 하더라도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정보와 자료의 접근과 검색에 있어서나 편집에 있어서도 시간과 자본의 효율을 생각할 수 없다.

요컨대, 아무리 신선하고 가치 있는 뉴스원이라 하더라도 컴퓨터라는 솜씨 좋은 요리사 없이는 아침 식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책과 대화 속에서 사라진 담론의 구조와 형식도 컴퓨터 대화방에서나 찾을 수 있다. 현대인의 소외의 개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문학이 인간의 구원을 문제삼고 철학과 종교와 역사를 그 매개로 하고 있다면 인간의 내면적 성찰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과 글쓰기 행위에 대한 반성적 성찰 또한 문학의 고유한 미덕 아닌가? 그런 갈등은 기계 문명의 전반에 걸친 반성의 문제일 것이지 문학에만 국한된 건 아닐 것이다.

◆ 송 : 물론 나도 컴퓨터 글쓰기를 경계만 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대세이고 이미 나도 그 물결에 깊숙이 휩쓸려있다. 소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그것을 잘 운용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클 수도 있다. 현대인의 라이선스 수집품 기호에 비추어 보면 내가 운전면허를 갖지 못한 소외감이 그 한 예일 것이다. 분명 나는 워드 작업에서조차 서툴다. 아무리 교정하려해도 나는 엄지와 검지만 사용할 뿐이다.

그리고 그 외의 내 컴퓨터에 대한 능력에 대해서는 깜깜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오르지 내 글이 저장되어 있는 방만 왔다갔다했다. 한번도 게임이나 대화방에 기웃거린 적이 없다.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인 컴퓨터는 그런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삼손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하든 워드로만 부려먹겠다고 생각한 건 처음부터 내 자신과의 약속이다. 아무튼 화면을 열고 단계적으로 키를 두드려 글을 쓰던 방을 찾아가는 여정은 한마디로 외롭고 쓸쓸하다.

수많은 갈래의 방으로 이루어진 그 체계는 언어의 미로를 헤매는 작가의 형식과 흡사하다. 나는 거기에서 두엄더미 같은 내글과 만난다. 손가락을 괭이처럼 힘 줘 두들기는 그곳은 내 삶과 글의 막장이다. 내가 그 막장에서 소리치는 절망의 외침은 중층적이다. 하나의 층위는 이 화려한 세상에서 어둠침침한 글쓰는 기술밖에 보유하지 못한 능력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뛰어난 글을 쓸 수 없는 내 얕은 상상력의 한계에 절망함이다. 그러나 나는 내 절망이 더욱 깊고 처절해지길 바란다. 그게 내가 걸어야 할 길이다. 결국, 컴퓨터에 대한 이 지루한 이야기도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 이 : 「그대가 심연을 응시하면 심연도 그대를 응시하리니」하는 니체의 말이 있다. 문학이야말로 저 어두운 심연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인간과 역사의 두레박이 아니겠는가. 이 문명 과잉의 비국의 시대에 어쩌면 컴퓨터란 문화의 형식도 캄캄한 사유의 바다를 떠도는 노아의 방주일 수도 있겠고 악몽을 내재한 현대판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겠다. 이제 이야기를 바꿔 해 보자. 글 쓰는 사람들의 집에 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책더미에 눈길이 쏠린다. 이 방안에 있는 책들은 문학을 하기 위한 독서용인가.

◆ 송 :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살림의 일부일 뿐이다. 다만, 때때로 가구나 식탁의 먼지를 닦아주어야 하듯이, 책들도 먼지를 털어 주어야 한다. 그 작업으로서 책읽기는 언제나 괴롭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쓰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그냥 읽는 즐거움으로서의 독서를 열망한다. 그러나 내 어줍잖은 습작의 속박으로부터 독서 방법과 책들은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 있는 책들은 꼼꼼히 계획하고 분석해서 사 모은 것이다.

영상 매체가 온 감각기관을 포로로 하고 있는 시대라지만 나 자신은 여전히 인쇄 매체의 세례자라고 생각한다. 그 더디게 읽히는 촘촘한 활자 속에서 이제껏 나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을 얻었다. 내 관점에서 책은 모두 견인주 의자이다. 나는 요즘 불교 초기 경전과 노자를 읽고 있다. 젊었을 적 책과 더불어 어지럽게 떠났던 지적 모험의 출발점에 다시 와 선 듯하다. 다시 둘러보아도 언제나 세상과 그은 어렵다.

◇ 이 : 흔히 작가의 고향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한다. 현재 고향에 머물며 글을 쓰면서 작품 속에 드러나는 고향의 정서가 있다면?

◆ 송 : 대부분의 작가들은 고향을 떠난다. 아니. 누구든 고향을 떠난다. 새가 둥지를 떠난 듯,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삶과 영혼의 고양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게 되는 것이 삶의 구조다. 본개 삶의 원형으로서의 고향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으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세기말을 사는 우리는 슬프게도 고향을 상실한 세대이다. 방향을 상실한 길 위의 세대이기도 하다. 아울러 내가 사는 이 동네만 둘러보더라도 끊임없는 이농현상으로 동공 상태가 되어버린 한국 농촌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고향을 우울하게 바라본다. 이제 농촌은 모성을 간직한 대지로서의 이미지와 생명의 원형질로 충만도니 전원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농촌과 도시의 경계는 사라지고 도시적 삶과 그 주변부만 있을 뿐이다. 도시적 소비형태와 오락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관철한다. 이 동네만 하더라도 이미 단란 주점이 두 곳이고 화면 속 댄스 그룹의 격렬한 리듬과 율동이 어린 아이들을 지배한다.

아파트와 승용차가 삶의 질의 향상이라고 한다면 굳이 그걸 피해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학은 시멘트와 아스팔트 위에서도 삶의 근원을 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시속에서 고향이나 전원을 노래한 적은 없지만 내 시선이 고향 너머에 있던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서 이미 내 삶의 지근거리에 있는 대청호를 이야기하고 있다.

◇ 이 : 문학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고향에서의 송찬호씨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글쓰기의 불리함이나 불편함으로 비칠 수도 있을 터인데.

◆ 송 : 어려움이 별로 없다. 문단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그 여건에 창작 활동을 제한 받는 것은 아니다. 내글은 문예지에 고루 발표된다.

◇ 이 : 끝으로 가족의 소개나 앞으로의 계획은?

◆ 송 : 교편을 잡고 있는 아내와 아들과 딸이 있다. 아내는 내 일을 이해해주는 사려 깊은 동반자이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나는 언젠가 어린 아들을, 벌레와 문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녀석이 이제 글을 깨치고 더듬거리며 책을 읽는다.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읽고 배우는 중이다. 올해 나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써 줄 생각을 갖고 있다. 어느 덧, 나도 세찬 물살의, 생의 한가운데 서있는 느낌이다.

◇ 이 : 송시인의 활발한 창작활동을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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