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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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주사
  • 홍근옥 (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 승인 2020.02.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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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앞의 줄이 조금씩 줄어든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테이블 위에는 알콜 램프 하나가 켜져 있고 흰 옷을 입은 간호사는 커다란 주사기를 램프 불에 소독을 하며 한명씩 어깨에 주사를 놓아댄다. 가슴이 쿵쾅쿵쾅, 숨이 답답하다. 차라리 얼굴을 찡그리고 어깨를 감싼, 먼저 맞고 돌아서는 친구들이 부럽다.
 벌써 오십년이 다 된 일인데, 어찌 그리 생생하게 기억이 날까? 바로 불 주사를 맞는 날이다.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예방주사를 맞는 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공포, 아니 숨 막힘. 초조하게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꼬맹이들, 어깨에 따끔하면서도 쓰라린 주사의 감촉까지 지금도 생생한 장면들이다. 그 공포의 불 주사는 다름 아닌 결핵예방주사, BCG였단다. 불에 주사바늘을 구워가며 주사를 놨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주사 바늘 몇 개로 많은 아이들에게 접종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아이들에게 불 주사는 성분이나 이유와 관계없이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맞던 불 주사는 사라진 것일까?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불 주사나 BCG얘기는 없고 홍역, 소아마미, 파상풍, 일본뇌염 등등의 새로운 예방접종들이 시행되고 있단다. 그것도 입학 전에 개별적으로 접종을 하는 것으로 돼 있다. 시대에 따라 예방접종의 종류와 방법이 바뀐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병들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곰보얼굴이 가끔 있었다. 이것은 천연두, 마마를 앓고 난 흔적이라고 하니 천연두 환자가 가끔 있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고 예방의학이 발달하여 지금은 천연두가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완전히 사라진, 기록속의 질병이 되어버렸다. 또 하나 우리 조상들을 떨게 했던 질병은 장티부스, 일명 염병이라고 불리는 설사병이었단다. 오죽하면 욕으로 남아서 아직까지도 나이든 분들에게는 가끔 입에 오를까 싶다.  불과 2-30년 전만해도 에이즈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 전에는 암이 치명적인 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암과 에이즈는 치료법이 발달하면서 생존율도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사람들도 그 병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오래된 병들이 극복되거나 익숙해지는 사이, 새로운 놈들이 나타났다. 사스에 메르스에, 이번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생겨난 것이다. 사실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고 손을 씻고 마스크를 하는 등의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 예방할 수 있다고 하니 어쩌면 그리 호들갑 떨 일은 아닌 듯싶기는 한데, TV나 인터넷이나 틀기만 하면 코로나19 얘기다. 중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각국에 몇 명의 환자가 발생했는지, 몇 명이 이로 인해 죽었는지가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우리 지역에 혹시나 환자가 발생할까 뉴스를 주시하고, 손 세정제에 마스크가 열 배 가까이 치솟고, 웬만한 모임과 행사는 물론이고 학교의 개학도 미루어지고, 관광이나 외식업들은 그야말로 폭탄을 맞은 상황이란다.
 50년 전, 불 주사의 기억을 오늘 다시 찬찬히 되짚어 본다. 불 주사는 사실 통증의 기억이라기보다 공포의 기억이다. 실제로 주사바늘이 쓰리고 따갑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통증이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보면 공포를 줄일 수만 있다면 불 주사도 코로나도 암도, 어쩌면 죽음까지도 그렇게 엄청난 녀석들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19 덕분에 좋은 습관도 생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는다. 가능하면 쓸 데 없이 나다니는 것도 줄이게 됐다. 대신 가족과 더 시간을 보내게 되고 시간이 많다보니 안 하던 영어공부도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어디까지 왔는지, 몇 명이나 죽었는지 최신 뉴스를 검색하는 일은 가능하면 안하려고 한다. 불 주사가 어디까지 왔는지 앞의 친구들 숫자를 세면서 벌벌 떨던 50년 전,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공포가 실제 통증보다 수 십 배, 수 백 배 더 강력하고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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