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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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놀이
  • 오계자(소설가)
  • 승인 2020.02.1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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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유행가 가사 한 구절을 흥얼거리는 친구가 측은해 보인다. ‘저 세월은 고장도 없느냐.’고. 오지랖 넓은 내가 물었다. “세월 고장 나면 뭐할 건데?” 옆 친구들까지 잠시 조용하다가 “가는 세월 그 자체가 서러운 게 아니고 점점 뒷방으로 밀려서 관심조차 줄어드니까 그렇지.” 그 심정을 왜 모르랴. 허나 젊은이들은 맞벌이에 바쁘고 손자손녀들은 공부 하느라 시간여유 없는 시대 아닌가. 관심 달라고 눈 빠지지 말고 내가 나에게 관심을 주면 된다고 늘 친구들에게 권한다. 처음에는 이해를 잘 못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이해를 하기 시작 했다.
살면서 힘든 일이 닥치면 흔히들 세월이 약이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실제로 약이 되어 변화시키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자신을 더 아끼고 더 강건해야 된다는 진리도 알게 된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잘못 이해하면 이기주의가 될지 모르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도 내 몸과 정신은 내가 지키자는 뜻이지 이기도 아니고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철학자 톨스토이는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환갑을 넘기고서야 그 말의 뜻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늙어감이야 누구에게나 햇살처럼 차별 없이 스며드는 우주의 섭리라고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 변화로 인해 나도 모르게 놀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어른들께서 음식을 못 드시고 “목에서 넘어가지 않아.” 하시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꿀꺽 삼키면 될 것을 왜 저러실까 했다. 그런 내가 어제는 고구마를 먹다가 진짜 넘어가지 않아 물의 도움으로 삼키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평소 식사 때든 간식이든 물을 멀리하던 습관 때문에 작은 충격이었다. 
전에는 어머님 방의 TV볼륨이 너무 높아서 거실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요즘 나 혼자 앉아서 볼륨 숫자가 지난 1년간 2단계 올랐다. 올리지 않으면 내 몸이 저절로 TV 가까이로 다가 간다.
“나는 훗날 늙어도 멋진 할머니가 될 거야.” 했던 그 새댁은 지금 민낯에 추리닝 차림으로 시장 골목에서 시금치 한 단을 백 원이라도 싸게 사려고 흥정하는 할미가 되어있다. 문인들이 대부분 여인의 삶은 곧 어머니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라며 길에 비유한다. 지금 내가 바로 그 길을 체험하고 있다. 멀리 돌아 볼 필요 없다. 엊그제처럼 느껴지는 불과 몇 년 전, 어머님의 생활 습관이 눈 떠보니 내 것이 되어있다. 어릴 적 하던 기차놀이 같다. 새끼줄 원형으로 묶어 여럿이 새끼 줄 안에 들어가 칙칙폭폭 하면서 제일 앞선 사람의 방향과 속도에 따라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던 놀이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는 운동회 때 가족 달리기를 기차놀이로 했던 추억도 있다.
지금, 어머님께서 운전하시는 기차를 타고 뒤 따르는 중이다. 아주 싫어하던 국물에 밥 말아 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오늘은 기차놀이에서 살짝 반항 끼가 발동한다.
벗어나 보려고, 수영장엘 다녀와서도 벌러덩 드러눕지 않고, TV도 켜지 않으며 우아한 척 로즈마리 차향 음미하며 책을 펼쳤다. 시간이 얼마나 스쳐갔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밤이 되었는가하면 책은 겨우 두 쪽을 읽었고 바람 소리에 “네, 누구세요?” 하며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있다. 순간 포도나무, 목련 나무 다 어디로 숨고 눈앞은 허허벌판이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소파에 앉으니, 입만 살아서 친구들과, 문하생들에게 쏟아 놓은 조언들이 자르르 내 오지랖에 쌓인다. 어처구니가 없다. 오늘 밤 내 일기장엔 이렇게 장식했다.
기차놀이에서 억지로 내리려 하지 말자. 그럴수록 새끼줄은 더 조여 올 것이니까. 내 습관 버리려고 애쓰지 말자, 애쓰면 쓸수록 더 깊어진다는 걸 경험 하고 있지 않느냐, 그냥 무관심으로 팽개치면 저절로 해결 되니까. 좋은 습관 만들겠다고 애쓰지 말자, 정붙여 하다보면 저절로 습관이 될 터이다.
일기장을 덮고 누워 상상의 나래를 편다. 내 기차에서 나는 녀석들을 위해 어떤 길을 닦아 놓을까, 내 기차 안에서 즐겁도록 하려면 돌아서서 너희들이 운전 하라고 할까. 그러려면 내가 젊은이들의 눈높이를 터득해야겠지. 그게 좋겠다. 삼종지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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