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보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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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보내며 ~~
  • 김종례(시인/수필가)
  • 승인 2019.11.28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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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을 뿌리고 사랑을 품었던 봄날의 소망, 윤기 가득히 채워졌던 폭풍우 같은 여름날의 열정, 가슴 밑바닥까지 붉은 물이 홍건하였던 화무십일홍의 가을 풍경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간다. 夫(덧말:부)春(덧말:춘)生(덧말:생)夏(덧말:하)長(덧말:장), 秋收冬藏(덧말:추수동장)의 이치를 조금씩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찬 서리 내리도록 웅크리고 앉아 있던 금송화의 청순함을 끝으로 모두 텅 비워낸 정원이다. 감나무는 취기 도는 여인네 얼굴같은 까치밥 몇 개 움켜쥐고는, 무엇이 그리도 아쉬운지 빈 가지를 흔들어대며 배웅한다. 초록을 지우려고 햇살 한줌 받아내는 시래기의 철학도 참 아이러니컬하다. 오직 사람을 위하여 바람과 포옹하며 온 몸을 비틀어대다니… 비움과 침묵의 저 들판은 속죄의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낙엽의 행보 분주하고, 제 이름 하나 허공에 매달고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아우성인 양, 바람의 노래 소리 들려온다. 만물의 갈무리를 끝낸 우리네 가슴에도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 가득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적마다 왈츠를 추어대던 검불때기마저 빈 수레에 실려 보내버리니, 의외로 머리가 개운하고 온몸이 가벼워진다. 쓸쓸하고 허전함이 엄습해 오나 싶더니, 새삼 별빛처럼 정신이 맑아오는 건 또 웬일일까? 어수선했던 마음도 편안해짐은 또 무슨 변칙인지 모를 일이다. 무한정 서글픈 건지, 유유잠잠 여유로운 건지, 마음의 갈피가 낙엽처럼 날리며 스산해지는 요즘이다. 오래전 소수민족 프에믈로족은 11월을 만물을 거두는 달이라 칭하였고, 아라파호족은 모든 게 다 사라지는 건 아닌 달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곧 된서리도 내리고 얼음도 얼어붙을 12월이 오더라도, 우리들 삶의 치부가 마른껍질처럼 굳어지지 않도록 삭풍 부는 겨울도 살뜰히 데워줘야 할 것이다. 행복도 고통도 마음 한 가지에 매달려 있는지라, 충만한 계절도 허전한 계절도 한 순간에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심신의 휴식을 위하여 서글픔을 잠재우고 11월의 찬가를 불러야 할 것이다.
 11월은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추억의 달이다. 만찬을 즐기는 잔칫집마냥 풍요로웠던 빈 정원을 내려다보면, 안개같이 사라진 아차 싶은 세월 속에 단풍잎처럼 익어가고 있을 옛 동무들이 떠오르고, 밤의 고뇌로 물들은 참나무 숲 속 어디선가 어머니 한숨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지란지교 동무 집에 마실 오는 것처럼 꿈에라도 한번 못 다녀가시는 연유를 여쭙고만 싶어지는 달이다. 오랜 인연으로 정다웠던 사람들도 하나 둘 별처럼 날아가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들 찬바람에 아침이슬처럼 사라지진 않을까~~ 쥐똥나무 울타리를 넘어서 구불거리는 골목을 지나 아주 멀리 떠나지는 않을까~~ 갑자기 조바심이 드는 요즘이다. 그 누구도 삶의 정상이나 골짜기에 영원히 머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은 깊은 명상과 사색에 빠져드는 여운의 달이다. 내 나이 가을에서야,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이 그리움의 빛깔인 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한 가닥이 세월의 발걸음인 것을 알아챘으니 말이다. 생명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우주의 본질을 찾으려는 겸손함과 진솔함을 배우게 된다. 은근과 끈기를 가르치던 국화향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였던 젊은 날도 있었다. 모두가 떠났어도 묵묵히 제자리 지키는 저 감나무처럼 진솔한 삶이 되리라 마음먹었던 중년도 있었다. 그런 나와의 약속이 무모하였다는 것도 깨달아가며, 이리도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노을빛 황혼을 기쁘게 맞이하리라 다짐한다. 한낮의 태양이 찬란했기 때문에 곱고 아름다운 노을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11월은 오히려 축복의 계절이 아닐까도 싶다.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반복하며 삶의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정길에서 부질없는 욕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는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만의 향기가 점점 빛바래며 사라진다 하여도, 대신에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니 그러하다. 세월의 연륜을 긍정적 마인드로 다듬어서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 가고만 싶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우주의 섭리를 가슴에 새겨야만, 다가오는 봄의 소망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11월은 별빛처럼 아름답고 처연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가 잘 어울리는 달이기도 하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그 여름이 가면 다시 세월이 간다.~ 아~~ 그리워라, 그리워라, 나는 널 찾아가노라’ 한해의 종점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인생의 연륜을 조금씩 익어가는 거라고 위로하며, 펄럭이는 마지막 달력장도 힘차게 넘기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봄이 마땅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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