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와 신미대사
상태바
한글창제와 신미대사
  • 최시선
  • 승인 2019.10.24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아무리 천재이고 음운학에 밝았다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숨은 공로자가 있지 않을까? 바로 당시 언어학에 능통하고 학승이며 실록에도 기사로 69건, 이름으로 140번 등장하는 신미대사가 아닐까?
조선은 유자의 나라였다. 고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따라서 그동안 기득권을 누렸던 승려들은 천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사대문 안에 들어올 수 없었고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실록이나 역사서에도 기록되기 어려웠다.
한글은 세종대왕 단독 창제설이 현재의 정설이다. 뜨거운 애민정신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임금이기에 새로운 문자 창제가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 험난한 과정을 혼자 해냈으리라고 믿는 이는 많지 않다. 누군가 도와 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이런 의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에“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중략)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이 전부다. 원본 한자는 모두 57자다. 그 위대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이렇게 간단히 기록할 수 있는가? 이는 훈민정음 창제가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반포는 3년 후인 1446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세종 28년 9월 29일 기사에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어제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한자 54자로 되어 있다. 108자의 딱 절반이다. 이는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어 더욱 명확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했다고 분명히 밝히데 왜 신미대사가 기여했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가? 거기에는 합리적이고도 맥락적인 근거가 있다.
신미는 영산(충북 영동) 김씨로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수성이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아버지 김훈이 유배형에 처해지자 속리산 복천사로 출가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해 주역과 불경은 물론, 산스크리트어(범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의 친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이 쓴 ‘식우집’ 복천사기에 의하면 세종이 신미를 불러서 만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최근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에서 “한글 모음 11자는 신미대사가 추가했다”고 주장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정 교수에 의하면 세종이 처음 만든 글자는 초성 27자였는데 신미가 중성 11자를 추가해 훈민정음이 완성됐다고 말한다. 이는 신미가 소리문자인 범어 전문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세종은 유훈으로 신미에게 26자나 되는 긴 법호를 내린다. “…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국이세(佑國利世)란‘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나라를 도운 것이 무엇일까? 그때는 나라가 곧 임금이었으니세종의 한글창제를 도운 것이 아니냐고 추론할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언해본을 보면 곳곳에 불교의 법수가 박혀 있다. 이건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글 코드다. 3. 28. 33. 108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 언해본의‘나랏말싸미 중국에 달라~’의 글자 수는 정확히 108자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장수는 33장이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이다. 어느 한글학자는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기획된 숫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불경 언해였다. 왜 그랬을까? 조선 백성의 정서는 아직 불교였기 때문이다. 신미는 각종 불경 언해를 주도한다. 신미가 한글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 많은 불경을 그리 쉽게 언해할 수 있었을까?
신미는 1426년(24세)에 속리산 복천사로 가서 두문불출하다가, 1445년(43세)에 경기도 대자암 주지로 부임한다. 대자암은 왕실이 비호하는 사찰이었다. 세종은 왜 신미를 대자암의 주지로 불렀을까? 평소 친분이 없는 사람을 그 중요한 사찰의 주지로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분명, 세종과 이미 소통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평전’을 쓴 박해진 작가는,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신미를 만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신미의 친동생인 김수온을 통해서도 신미를 알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을 무척 총애했다.
신미대사가 창제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맥락적인 이유는 또 있다. 세종이 죽기 얼마 전 신미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를 베풀게 하고 높은 예절로써 대우한다. 가장 천한 중을 임금님의 침실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또 하나는 바로 유훈으로 내린 법호에 대한 치열한 반대 상소다. 실록에 기사로 총 11건이 나오는데, 하위지와 박팽년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왜 그토록 불가 상소를 올렸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에 ‘결왈(訣曰)’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런 표현은 주로 선사들이 게송 형식으로 끝을 맺는 시적 표현이다. 칠언고시 형태로 새로운 문자의 원리를 요약해 놓았다. 이건 훈민정음 원리를 통달한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혹시 신미가 지은 건 아닐까? 신미는 짓기만 하고 유신들이 지은 걸로 한 것은 아닐까?
아무리 뭐라 해도 한글은 세종이 창제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역사적 맥락이나 정황으로 보아 조력자가 있었고, 그 조력자는 바로 신미대사일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세종이 고의적으로 은폐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속리산 복천암 월성 큰스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님은 평생 신미대사를 연구한 분이다. 스님은 “관련 기록을 유신들이 다 지워버렸다”고 일갈했다. 만일 그랬다면, 역사적 진실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최시선 (한글창제와 신미대사 연구회 회장/청주문인협회 부회장/진천 광혜원고 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