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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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리
  • 홍근옥(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 승인 2019.10.1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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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꽃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아니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 무슨 꽃 타령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가을은 꽃의 계절이다. 내 주변에 보이는 꽃들만 대충 훑어보자. 우선 늦여름부터 울타리 밑에 피기 시작한 백일홍과 코스모스를 시작으로 국화, 해바라기, 물봉선, 유홍초, 층층이 꽃,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 잔대, 부추, 여뀌, 참취, 달개비, 거기에 이름도 재미있는 사위질빵과 며느리 밑씻개까지...... 봄꽃에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가을을 꽃의 계절이라고 부르는데 결코 부족하지 않을 숫자다.
 가을꽃은 봄꽃과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봄꽃은 붉거나 노란색이 많은 반면 가을꽃들은 보라색과 흰색이 많다. 어쩌면 가을 볕 속에는 이런 색깔이 더 많이 들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특징은 봄꽃에 비해 가을꽃들은 작고 소박하면서도 좀 더 오래 가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봄꽃은 반가운 만큼 아쉽게 금방 져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가을꽃은 아침 이슬 속에서, 혹은 찬 서리가 내릴 때까지 은근히 버티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내게는 봄꽃은 반갑고 화려한 꽃, 가을꽃은 소박하고 애잔한 꽃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
 소박하고 애잔한 가을 꽃, 그 대표적인 꽃이 오늘의 주인공 고마리다. 개울바닥이나 논둑이나 혹은 그냥 길 가 버려진 땅에 잡초로 흔하게 자라서 도저히 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풀,
여차하면 뽑아버리거나 제초제를 뒤집어쓸 것 같은 쓸모없는 잡초, 그런데 요즈음 고마리는 잡초가 아니라 꽃으로 변신한다. 보리쌀 정도의 붉거나 흰색의 작은 꽃들을 수없이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을 지나면서 진할 대로 진해진 초록의 잎들 위로 자그마한 꽃들을 달고 있는 모습은 꽃을 피웠다기 보다는 마치 잎들이 뿜어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언뜻 지나치면 꽃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꽃, 그런데 눈높이를 낮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하다. 마치 그라데이션 처리한 것 같은 붉고 흰 다섯 가닥의 통 꽃을 당당하게 벌이고 있는 매혹적인 모습, 문제는 너무 작다보니 벌들의 눈에 띄기 쉽지 않다. 너무 작으면 꽃의 크기를 키우거나 강한 향기로 무장할 것 같지만 고마리는 특별한 방법을 쓴다. 수많은 이웃들과 모여서 함께 피는 것이다. 경쟁하여 혼자 돋보이기보다는 함께 협력하는 생존전략을 선택한 셈 인데 무심한 내 눈에도 잘 띄는 것으로 봐서는 일단 성공인 듯싶다.
 고마리, 정겹고도 어여쁜 이름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두 가지 설이 있단다. 워낙 흔해서 이제 고만 피라는 뜻의 고만이가 고마리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더러운 물에서 자라나 물을 정화하니 고맙다는 뜻에서 고마리가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앞의 설명이 맞을 듯싶은데 나는 왠지 후자를 택하고 싶다.
 고마운 꽃 고마리, 내가 고마리에게 고마운 것은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다. 흔하고 보잘 것 없는 잡초가 뒤늦게 예쁜 꽃으로 변신하는 반전이 내게 은근히 위로와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의 주목을 받을 만큼 화려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내게 고마리는 조용히 속삭여 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제라도 얼마든지 꽃을 피울 수 있어, 작은 꽃이어도 괜찮아’ 라고 말이다.
 크고 화려한 꽃들, 이른 봄에 태어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는 꽃들은 고마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도 예쁜 꽃이었구나 하고 축하해 줄까, 네가 무슨 꽃이냐고 은근히 무시할까, 아니면 도나 개나 꽃이라고 나서게 된 세월을 한탄할까? 그러나 고마리는 그런 남의 평가에 관심이 별로 없다. 그저 남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땅에서 굳이 남보다 빨리 피려고 경쟁하거나 눈에 띄려고 애쓰지 않고, 그러나 기죽지도 않고 당당하게 꽃을 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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