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상태바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고
  • 오계자(소설가)
  • 승인 2019.10.09 13: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기의 영웅은 난세亂世에 태어난다. 세기의 시詩 또한 절박함에서 태어나게 되어있다. 아픔이 지나쳐 절박할 때 가슴 바닥을 박박 긁는 울음이 터지기 마련이다. 시는 현실이다. 물론 상상 속에서 창작 되어야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근거해서다. 그러다보니 조선 말기부터 천구백오륙 십년 대의 수난기를 겪어야했던 시인들의 가슴은 더할 나위 없다. 
우리 민족이 경술국치부터 1945년 해방까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과 그 후유증 등 가장 큰 수난이며 격동의 시기가, 1918년에 태어난 오장환 시인의 일생이기도 하다. 그 시대에 삶이란 모든 백성들이 다 겪는 아픔이지만 시인의 감수성은 아프다 못해 절망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그 시대 그 입장이 되어 보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답답해진다. 게다가 은근슬쩍 술수를 아는 시인들이야 환경에 잘 적응하지만 오장환 시인의 인품을 내가 어찌 알까만 기록이나 그분의 작품을 보면 주장이 확실하며 소신이 뚜렷하다. 구석구석 다 뒤져도 일제강점日帝强占기에 눈곱만큼이라도 눈치를 본다거나 소신을 굽힌다거나 비슷한 글귀는 찾지 못했다.
얼마 전 내가 신동문 시인의 일대기를 소설화 하기위해 그분의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공부했는데 그분이 소신껏 살자는 젊은 혈기가 앞섰다면, 같은 주장이라도 오장환 시인은 농익은 느낌이 든다.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신동문 시인이 직설적으로 썩어가는 지성인들을 비판한 칼럼이 떠올랐다.
‘병든 서울’이 장시長時 형태지만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서술적으로 풀어가는 느낌, 감정에 공감을 함으로 인해서 가슴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본인은 해방을 맞는 날 병실에서의 울음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우는 시민들과 다른 울음이라고, 개인의 울음이라 했다. 허나 내 생각은 모든 민족의 울음이 같은 울음이 아닌가 싶다. 36년의 서러움이 폭발한 울음, 즉 기쁨과 서러움이 뒤엉킨 울음이 아닌가. 누군들 그 울부짖음에 개인의 감정이 어찌 이입되지 않으랴.
믿어지지 않던 해방이 현실임을 감지하고 서울의 거리로 나왔을 때는 이미 희망찬 서울의 거리가 아니었다. 씩씩하고 굳건한 청년도, 밝은 웃음도 보이지 않고 기대와는 정 반대의 거리임을 보았을 때 그의 가슴은 울분과 한탄으로 바뀐다. 오죽하면 병이 든 서울이라 했을까.
발밭은 장사꾼들, 기회주의 정치꾼들뿐만 아니라 아부하는 글쟁이들의 칼럼에도 비위 상했을 것이다. 격동의 시기에 분노와 좌절에 기울지 않고 적당히 비판하면서,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맑게 갠 하늘을 기대한 대목에서는 그분의 미래지향적인 사고思考를 알 수 있다. 동시에 해방된 국민이, 사회가 걸어야 할 방향을 적절하게 제시한 시라고 생각한다.
이 시를 다시 찾은 내 심정은 요즘 돌아가는 사회가, 정치가 깊은 수렁에서 헤매기 때문이다. 오늘도 뉴스를 보면 광화문이 몸살을 한 모양이다. 
작금의 정치가 총칼 없는 전쟁이다. 겁난다. 서로 물고 뜯다가 망한다고 했던 아베노부유끼의 고별사가 소름끼치도록 알찐거린다.
그야말로 병든 대한민국이다. 표식동물들의 싸움에 온 나라가 들썩이다니, 깊이 병든 이 난세에 누군가 우뚝 솟아 방향제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막상 누군가 올바른 제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지 조차 깨닫지 못할 판이다.
오장환 시인의 희망처럼 우리도 큰물이 지나면 하늘이 맑게 갤 것임을 기다려야 할까? 어차피 병든 나라를 구해 줄 치료사는 국민이다. 나라가 아프면 국민은 치료해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 치료 방법은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말고, 들썩이지 말고 맡은 임무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휴대폰에‘까꿍’하며 날아오는 말, 말, 말에 현혹되지 않고, 내 일에 소신껏 충실한 것이 바로 애국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