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에 대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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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에 대한 소고(小考)
  • 김홍춘
  • 승인 2019.06.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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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삼년산성을 오른다. 안개가 자욱하다. 성문의 주문인 서문에 이르자 참으로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한다. 마치 삼태기 안에 구름을 가득 담아 놓은 모양이다. 하여 이러한 성의 형태는 분지를 안으로 산능선의 줄기를 따라 축성하였기 고로봉(拷로峯) 혹은 포곡식 산성이라 한다. 거의 산성은 이러한 모양을 갖추었다.
한국의 성곽 특징은 지배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고 통치자와 피통치자 모두가 공동으로 준비한 생명의 보루로 존재하였고 힘센 아들과 딸의 전설은 모녀가 죽은 뒤 성황신(城皇神)이 되어 안전을 빌고 각자 역할을 나누어 적을 막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운명 공동시설이었다. 수해로 인하여 드러낸 문지는 서문을 드나들던 수레자국이(1.66m) 큰 수레가 다녔던 곳으로 짐작된다. 문의 형태가 외문(外門)으로 특이한 형태의 성문으로 건축되었다.
그 후 성문의 노후화로 다시 재건축할 당시 안으로 문을 여는 내문(內門)이었다. 짐작컨대 신라의 통일과 고려시대 삼년산성의 가치는 반감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둘레 1680m 높이 13~20m 폭 8~10m로 축성된 성은 약7곳에 곡성을 쌓으므로 최고의 방어용 성이다. 서문을 지나 남문을 향한다. 성벽 중간에 있는 남문은 현문이다. 현문은 사다리나 밧줄에 의해서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아마도 독특한 역할을 하던 기밀스런 문인 것 같다. 돌아 동문을 향해 본다. 어느 순간에 분지에 가득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없다. 동쪽의 태양이 서서히 오른다. 동문에서 대야리 방향의 고분군을 바라보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무덤 속에 묻혀있는 곳이다. 병사들 보다 성을 쌓으며 안전사고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들의 무덤 속에 병사라면 병기와 함께하고 다른 이들은 밥그릇 수저 한 벌이었다. 국가는 저들에게 어떠한 보훈을 했을까? 마침 6월은 보훈의 달이다. 대한민국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충분한 보훈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동문의 수구는 지금도 오각형의 구조로 안과 밖이 훤희 통한다. 과학적이다. 1500년 이상이 흘렀건만...
북문 또한 동문과 마찬가지로 ㄹ자형으로 구성되어 계곡이지만 침투하기는 난해한 문이었다. 이 성은 대규모 전투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단지 무열왕이 백제를 함락한 후 경주로 향하지 않고 이곳 삼년산성에서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는다. 전략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천혜의 방어성인 이곳에서 왕문도는 칙서를 읽는 도중 급사했다. 참으로 의아하지 않는가? 이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기울기 시작한다. 현덕왕시 부친 김주원이 왕의 계승을 못하자 아들 김헌창이 반란하며 대단한 위세로 신라 9주 가운데 5개주를 점령하여 위세를 떨구자 정부군은 김헌창을 이 성에서 패퇴시켜 본거지인 웅진으로 쫓겨 그곳에서 끝내 자결한다. 삼년산성은 활용하지 못했다. 왕건 또한 견훤의 세력권인 이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여 퇴각하다 유금필의 도움을 받아 개성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삼년산성은 역사의 중심에 늘 있었다. 아미지로 내려오니 산바람은 버드나무와 함께 놀고 있었다. 뒤집힌 뒷면은 하얀 색이다. 탈춤꾼의 그 모양새다. 금방 산새들의 소리는 마음을 편안케 한다. 어느 나라가 되었든 망국과 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권력이 집중되고 권력층의 판단력이 흐려지며 저질 정치배들의 농단과 권력소진으로 망했다. 조선과 고려도 그래 망했다. 고구려 백제도 마찬가지다. 최약체 국가인 신라는 판단력과 결단력 공동체에 대한 권력층의 책임감으로 신라를 승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도 망했다. 우리의 역사인식은 시대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삼년산성 둘레길을 전국성 중 상위권에 선정했다. 우리 지역민들도 이곳 삼년산성에서 아침을 맞아보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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