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서랍 속에 갇혀있던 씨앗들을 정성껏 묻어주며. 대지의 혼과 습기를 빨아들여 어서어서 싹을 틔우라고 기원하던 봄날은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가 탄생하기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닮았었다, 그리고 목에 힘을 주며 해바라기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금쪽같은 떡잎 하나 힘겹게 밀어 냈었다. 대지를 뚫는 통증을 감내하며 혼신을 다해 습기와 양분을 공급해 주는 뿌리의 혼은, 마치 해산의 고통을 잊고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영혼과도 같다. 드디어 붉디붉은 한송이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순간, 씨앗을 묻었던 그 사람은 힘겨웠던 뒷바라지 모든 노고를 잊고 급기야 탄성을 지르게 된다. 숨겨왔던 생명의 비밀을 다 토해내며 피어오르는 꽃을 바라보면서, 영혼의 휴식을 얻지 못할 자가 누가 있으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시기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의 꽃을 피우듯이 말이다.
그렇게 꽃이 피었다 진자리에 무성한 잎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여름날에는 우리 마음에도 생명수 스미듯이 마음의 활력소가 모락모락 용솟음쳤었다. 초록을 뭉개고 앉아 씨름하는 녹음방초 속에 서 있노라면, 널부런히 터를 잡고 훈기 돌게 하던 하늬바람이 몸과 마음에 흠뻑 스며들었었다. 이렇게 여유롭고 싱그러운 신록의 그림자 아래서 다가올 소멸의 계절을 어찌 감지할 수 있었으랴! 마치 서서히 다가오는 노인삼반의 증세를 예측할 수 없었던 젊은 날처럼 말이다.
이렇게 잠시의 휴식을 주기 위해서 한 살림 거나하게 차렸던 꽃밭도 여름날의 자존이 점점 주저앉고 있는 요즘이다. 그리도 힘들게 창조한 제 분신들을 미련없이 허공에 내던지며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나 보다.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이별의 왈츠를 추어대는 낙엽의 축제에도 동참하고 있다. 계곡의 물소리도 배후의 바닥을 더듬으며 잦아들고, 숨어서 나누던 풀벌레 사랑도 휴식을 더듬으며 무덤을 찾아가는 가을이 점점 깊어만 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산들바람 앞에서 너도나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절감하고 있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서서히 한줌의 먼지로 사라지는 자연의 섭리에 순종해야 하는 짧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들 역시 왔다간다는 작은 흔적 하나 남기기 위해서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나 보다. 가을바람도 옹골차게 여물어가는 들녁을 어루만지며 저리도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만물이 동분서주하는 어수선한 가을 뜨락에서 우리는 내면의 강인함과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무던히 앞으로만 나가야 하는 인생 여정을 위해서라도 한해의 설거지를 다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바라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유익을 주던 이 꽃밭처럼… 다시 올 봄날의 소망을 담은 이 작은 씨앗처럼… 나도 오랜만에 석양을 등지고 여기저기 꽃씨들을 받느라 종종대는 요즘이다. 손을 벌리면 우수수 쏟아지는 씨앗의 의미를 생각하며… 다가오는 정유년 봄날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꽃씨들의 살림터를 구상하며…(끝)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