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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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정수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6.09.2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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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9월 정기 인사이동에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어수선하게 시작된 구월도 벌써 하순이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도 선풍기를 틀어가며 훌쩍 보내고 나니, 찜통더위를 잘 견뎌낸 감들이 달큰한 햇살에 빛을 발하며 점점 노을빛을 닮아가는 요즘이다. 연휴가 끝날 무렵, 어릴 적 전학하여 삼년동안 머물렀던 이식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가을 햇살에 천진난만했던 시절들이 잠잠히 잠자고 있는 교정을 거닐면서, 내가 거꾸로 빠져버렸다던 우물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가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배회하였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내가 누구게?’하며 나타나서는 내 눈을 두 손으로 가려줄 것 같은 소꿉친구들, 하늘처럼 존경스러웠던 선생님들이 어렴풋이 흑백 필름처럼 스쳐갔다. 그 많은 기억들 중에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아련한 그리움을 안겨다 주는 이별의 장면이 있었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전근 가시던 날의 추억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 도시락을 데워 주시다가 커다란 쇠 난로에 한쪽 다리를 심하게 화상 입으셨던 선생님의 하얗고 갸름한 얼굴이 뭉게구름처럼 떠오른다. 상처가 워낙 컸던지라 선생님은 작은 시골 자취방에서 오랫동안 누워계셨던 기억이 난다. 밤이 되면 별들이 촘촘히 인사를 해대던 논둑밭둑길을 지나 선생님 자취방을 방문했던 일, 엄마 몰래 광속에서 홍시감을 꺼내어 선생님께 갖다 드리던 일, 저녁마다 일과로 찾아가는 우리에게 아픈 몸을 이끄시고 꼼꼼히 공부시키시던 열정의 모습,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챙겨 놓으셨다 먹여주시던 자상한 모습들이 이 나이에도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새록새록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 이듬해, 산야에 가지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던 봄이 되자, 선생님은 한쪽 다리에 커다란 꽃잎 같은 상처를 안고 머얼리 전근을 가셨다. 그 때는 거기가 어딘지도 잘 몰랐는데, 아마 댁이 계시던 청주로 가셨던 것 같다. 전교생이 봉황 버스 타는 곳까지 기찻길마냥 양쪽 행렬로 배웅을 하며 아쉬워하였다. 두 눈이 토끼처럼 빨개지도록 울고 또 울면서 엄마 잃은 철새처럼 모두는 서러워하였다. 선생님도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그 많은 아이들을 부둥켜 안아주시곤 함께 울으셨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실로 아름다웠던 이별의 광경이 오늘 이렇게 다시 눈물나게 한다. 선생님을 보내고 돌아오는 다리 아래 시냇물이 왜 그리도 서글픈 소리로 들렸는지, 길가의 제비꽃이며 쑥부쟁이가 왜 그리 외로워 보였는지, 그 이후로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선생님의 행로가 궁금하기만 할 뿐이다. 해마다 전근의 주간이 돌아오면 여전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이별의 장면이다. 지금은 발령이 나도 소주잔 한번 부딪치고 떠나가면 그만이지만....40여년 교단에서 수없이 반복해 오던 전근과 이별의 순간들이었지만... 나는 우리 선생님처럼 진한 이별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오늘날 교사들의 일상이 너무나 일정한 틀 속에 갇혀있고 메말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여기던 우리네 관념이 감정도 눈물도 없는 전근과 이별로 자리매김 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은 왜 이처럼 분주하고 메마른지를 짚어봐야 할 것이다. 아이들과의 애정어린 대화의 단절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 시절에는 행여 선생님께 회초리를 맞더라도 후유증이나 부작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애타고 속 타는 담임을 위로하러 교실를 방문하는 학부형들이 있었다. 그럼, 오늘날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아이에 대한 밀도 높은 상담을 나눌 수 없게 된 것은 시대의 착오일까! 오늘날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는 일상은 과연 시간의 부재일까! 아이들을 설레임으로 기다리는 교사의 모티브가 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새록새록 쌓인 사제지간의 정으로 전근이 미루어지는 이변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얼마나 감동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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