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과 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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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과 야생
  • 김종례(시인)
  • 승인 2016.06.1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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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이라고 일컫던 오월이 때 아닌 무더위로 지나가고, 녹음방초 짙은 그늘아래 빈 의자 하나가 기다려지던 유월도 중순이다. 며칠 전 일찍 깨어난 새벽에 현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 세상 어느 싱그러움에도 비교할 수 없는 녹빛의 생수를 마시며, 두런두런 열리고 있는 여름 아침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울타리에는 넝쿨장미 수십 다발이 뜸이라도 뜨려는지 유월의 태양을 기다리고, 나는 감나무 잎새 사이로 우주의 정기를 안고 올 햇살을 기다리며, 이 한철 하늘아래 가득한 푸르름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아침이다. 머지않아 피어나려는지 분꽃, 백일홍, 겹주머니꽃, 긴대롱 방울꽃 가지들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이다지도 희망의 빛깔을 축복처럼 뒤집어 쓴 여름 아침은 세상사에 오염되지 않은 아이들에 비유해도 정녕 부족함이 없다.
한참 돌아다니다 데크 구석에서 눈길을 끌어대는 두 개의 화분으로 다가갔다. 어제까지 몽오리졌던 두 화분의 꽃송이가 만개의 모습으로 맞이하였다. 하나는 지인이 보내준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을 보낸 진자주빛 아마릴리스이고, 또 하나는 달포전에 대추밭 밭둑에서 캐 온 황금빛 호랑나리꽃이다.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대고 깊은 심호흡을 하였으나, 웬일인지 진자줏빛 아마릴리스는 전혀 향내를 품지 않았다. 조화와도 흡사한 나팔 모양의 진자주빛 꽃잎은 피어난지 사흘째 날, 커다란 꽃잎을 축 늘어뜨리며 급기야 볼상 사나운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릴리향내 나는 호랑나리꽃은 열흘이 지나도록 생기로운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온실속의 식물 아마릴리스는 그 보호막이었던 비닐하우스를 제거하고 나니, 자연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금방 나약한 모습으로 시들어 버렸다. 식용작물도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것보다는 노지에서 생육한 것들이 영양분이 많고 입맛도 돋궈주지 않는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단단한 보호막 안에서 자라난 아이는 외부의 낯선 상황에 부딪치면 쉽사리 좌절해 버리는 나약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쉽다. 들판에서 자라난 화초가 온실에서 자라난 화초보다 아름답고 튼실하듯이, 작은 걸림돌을 이겨내며 자란 아이가 세상의 역경과 어려움을 잘 돌파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아이의 재능이나 달란트를 빨리 발견해 준 부모는 그 단단한 보호막을 일찍 벗겨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리처럼 수영을 잘하는 아이, 참새처럼 노래를 잘하는 아이, 토끼처럼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 등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다 잘하는 아이로 바라거나 키우려고 온실 속에 아이를 가두어서는 아니 된다. 부모의 욕심과 생각으로 구속을 하기 시작하면, 자칫 향기없는 아마릴리스처럼 인성이 결여된 사람이 되기 쉽다. 아이들이 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안에서 자칫 사육으로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둘러볼 일이다. 아이 안에 숨겨진 재능이나 보물을 발굴내지 길러주는 작업이 교육이라면, 그 아이만의 특성을 무시하고 어른들의 생각대로 길들이는 것은 사육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면 자본주의 사회구조나 심리압박에 정신적으로 시달려야 하는 이 무한경쟁 시대에, 아이들마저 일찍부터 자유로움을 상실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잠수함 아래서도 자라가 헤엄칠 수 있고, 깊은 갱도 속에서도 카나리아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줘야 할 것이다. 비바람 햇볕과 씨름을 하며 야생에서 자라는 화초처럼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로 생기롭고 아름답게 성장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자연의 음악을 들으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성교육의 꽃밭이 아이들 앞에 활짝 피어나기를.... 우주를 나를 만큼의 상상의 날개짓을 펴는 파랑새같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 쑥쑥 자라나기를..... 안개 자욱한 새벽의 여명으로부터 깨어나고 있는 초하의 아침에 기원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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