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우정을 기리는 노래[3] : 喜雨亭頌歌 / 춘정 변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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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우정을 기리는 노래[3] : 喜雨亭頌歌 / 춘정 변계량
  • 장희구(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6.05.0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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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90】
춘정 변계량은 만조백관 중에 유독 자신을 선택하여 희우정송가를 지어 부르라는 어명에 감읍한다. 시인이 지은 시문은 문학적 상상력은 없어 보이나 임금과 백성에게 보내는 교서문의 형식을 갖춘 메시지 역할을 하기에 격이 높아 설득력이 있다. 시문 형식을 갖추었을 뿐 격을 중요시했던 조선 사회를 염두해 두고 보면 이른 바 파격이다. 그러나 명문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시인이 다시 종장에 칭송하면서 읊었던 시 셋째수를 번안해 본다.

喜雨亭頌歌(희우정송가)[3] / 춘정 변계량
군후들 조아리며 축원하는 군왕 만년
문인에게 부탁하여 그 전함을 길이 하니
받들어 글 지어 올리니 화봉 돌에 새기겠네.
君侯稽首我后萬年 思我文人以永厥傳
군후계수아후만년 사아문인이영궐전
臣拜撰辭爲多士先 瞻彼華峯維石可鐫
신배찬사위다사선 첨피화봉유석가전

희우정을 기리는 노래(喜雨亭頌歌)로 변역해본 율(律)의 셋째구인 칠언고시다. 작자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으로 문신이다. [내해 죠타하고 남 슬흔(싫은) 일 하지 말며…]로 이어지는 노래가 춘정이 남긴 고시조로 ‘화산별곡’ 등이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군후가 머리 조아리며, 우리 임금 만년수를 축원하였다. 문인(文人)에게 부탁하여 그 전(傳)함을 길이 하실 새, 신이 절하고 글을 지으니 많은 선비 중에 처음이었다. 저 화봉(華峯:북한산 봉우리)을 바라보니, 오직 돌에 만 새길 만하네]라는 시상이다.
전구에서 시인이 읊은 시심은 [날 듯 한 새 정자가 봉황새 나는 듯한데 , 그 누가 지었는가. 어지신 군후(君侯)였는데, 왕이 서교(西郊)에 납셨으나 놀이함이 아니오 . 백성이 한창 씨앗 뿌리는데 가뭄을 걱정하심이었다]라고 쏟아냈다. 왕이 서교에 납시는 것은 백성들 씨앗뿌리는 가뭄을 걱정함이라고 칭송했다.
시인은 군후가 성군의 만년수를 축원하면서 문인에게 그 전함을 길이 하셨다고 칭송한다. 곧 ‘희우정송가’를 지으라고 혼자만을 찍어서 선택한 것이다. 그 은혜를 감읍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화자는 성군의 깊은 뜻을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경복궁을 감싸고 있는 북한산 봉우리 돌이 그 덕을 새길만 하다고 칭송한다. 문학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송가의 칭송문임을 보게이다. 시인은 이글의 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이면서 글을 맺는다. [刊此頌章千古昭宣:위의 시문에 이어 마지막 구에 이 기리는 글을 새겨서 천고(千古)에 밝게 알린다]라고 읊고 있다.
【한자와 어구】
君侯稽首: 군후가 머리를 조아리다. 我后萬年: 우리 임금 만년수를 축원하다. 思我文人: 우리 문인을 생각하다. 以永厥傳: 그 전함을 오래하다.
臣拜撰辭: 신이 절하고 글을 지으니. 爲多士先: 선비 중에 처음이다. 瞻彼華峯: 저 화봉을 바리보다. 維石可鐫: 오직 돌에 새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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