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메카 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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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메카 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 나기홍 기자
  • 승인 2016.04.2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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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전남드래곤즈 홍보마케팅팀 정구호 팀장
어려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두마지기 논에서 공놀이를 하던 소년 정구호.
어려서부터 남달리 운동을 좋아했던 그 소년은 이제 프로축구구단인 전남드래곤즈의 대회운영, 예산확보, 언론홍보 등 전남드래곤즈의 실질적 살림을 관장하고 있는 홍보마케팅팀 팀장(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한면 차정리가 고향인 전남드래곤즈 정구호(53)부장을 만나 타향에서 살아온 그의 이야기와 보은의 스포츠발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운동을 좋아했던 소년 정구호
정구호 팀장은 1963년 아버지 고 정복용(83)씨와 어머니 김해순(80)씨 사이 3남 3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농촌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그도 학교를 다녀오면 소 풀 뜯기고 소 꼴 베며 여름을 보냈고, 벼 수확으로 논이 비면 두마지기 논에서 겨울방학 내내 축구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를 좋아는 했지만 초. 중. 고를 다니는 동안 그는 축구부에 들지는 않았다.
축구를 하려면 이런저런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가정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했던 정구호는 축구가 아닌 ‘화랑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 팀장은 “어릴 때는 키순서로 번호를 부여했는데 키가 작아 4~5번에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편에 속했었는데 중학교를 갔더니 친구들이 괴롭히고 힘들게 해서 운동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가서 키가 확 크더니 지금의 키가 됐다”는 말로 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화랑도’체육관에서 사범생활을 했고 친구인 김종희(현대자동차 소장)씨나 선배인 조남정(한우사랑 대표)씨가 화랑도 제자다.
긴 세월 타향인 전남 광양에서 살고 있지만 그는 고향보은도 자주 찾는다.
“고향의 친한 친구는 모임이 몇 개있는데 (안)우찬이, (최)상복이 하고 하는 한마음회가 있고 (김)종희, (임)정빈이, (박)장호 친구들하고 하는 모임들이 있어 자주 왕래하고 우정을 나누면서 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액션배우의 꿈 접고 전남 광양으로..
중학교 때부터 배운 그의 화랑도 실력은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고 이소룡을 좋아했던 그는 액션배우를 꿈꾸게 됐다.
군 복무를 마친 정구호 팀장은 서울에 있으면서 계속해 ‘화랑도’를 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1987년 미국의 관계자에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함과 동시 포스코에 시험을 봤다.
미국에서는 초청장이 오지 않았고 포스코에서는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고교졸업수준으로 포스코에 한번에 합격할 정도로 정 팀장은 학문적 실력도 잘 갖추고 있었다.
정 팀장은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에서 초청장이 시골집으로 왔는데 어머님이 미국에 안 보내시려고 장롱 뒤에 감춰놓고 안주셨다고 하더라구요”라며 “그때 마국에 안 간 것이 잘된 건지, 더 잘 됐을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머니 땜에 미국에 못갔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포스코에 입사한 정 팀장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언젠가는 스포츠계에서 일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직장을 다니면서 전남과학대학 사회체육학과을 졸업할 수 있었고 같은 직장에 다니던 전남 고흥이 친정인 부인 서미화(48)씨를 만나 결혼도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은 전남대학교 수학과 4학년을 다니고 있고 딸은 축구를 했다.
정 팀장의 딸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늘 축구를 하고 싶어 했는데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를 다닐 때도 축구를 시키지 않았다.
그는 “딸이 고교2학년 되던 어느 날 드릴말씀이 있으니 일찍 들어오시라고 하더라고요.
긴장했죠, 예기를 들어보니 죽어도 축구를 해야겠다는 겁니다. 안된다고 했더니 그럼 축구부 감독한테 테스트라도 받아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것마저 안 들어 줄 수가 없어 받아보라고 했어요. 근데 감독이 너무 좋으니 당장 내일부터 짐 싸서 보내달라고 하는데 안보낼 수가 없더라고요”라며 딸이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딸은 이후 서울 한양여대에 입학해 축구를 했고 졸업하면서 축구경기분석회사에서 경기촬영도 하고 분석도 하고 스포츠리뷰를 쓰기도 하며 공식 축구분석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구호 전남 광양에 깊이 뿌리내려
운동을 좋아한 정 팀장은 활발한 성격에 친화력이 좋아 포스코에 다니면서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광양에서 처음 한 사회단체 활동이 광양JC활동이었다.
정 팀장은 여기서 20여년 활동하다 부회장을 끝으로 전역했다. 회장도 할 수 있었지만 회원중 13명이 같은 나이라서 동갑 친구들 중 한명만이 회장을 할 수 있었던 구조였다. 과감히 광양토박이인 친구에게 회장 자리를 내준 것이다.
광양JC를 전역한 정 팀장은 ‘광양만라이온스클럽’을 만들었고, 63년생 모임인 ‘광양63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이 됐고 이 조직은 계속 발전해 현재 회원56명에 자산 1억여원, 26대 회장에 이르렀다.
정 팀장은 언론인이기도 하다.
그는 2003년 광양만신문을 창간해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신문사를 키웠고 그 신문사는 13년째 지역 언론을 주도하며 광양신문과 함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는 건실한 지역신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 팀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6년에는 광양신문이 주관하는 ‘광양만직장인축구대회’를 열었다. 광양에는 수많은 기업이 있어 이 대회에는 6~70개팀이 참가해 2개조로 나누어 토너먼트로 진행하는데도 3일간의 대회기간을 필요로 했고 이 대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광양시 최대 규모의 체육행사로 자리매김 했다.
대회가 이렇다보니 축구만 잘하면 기업이미지를 위해 어느 기업에서 스카우트해 가는지 모르게 취업이 될 정도로 이 대회는 축구인에게는 취업의 관문역할도 할 정도다.
보은사람으로 광양시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광양사람보다 더 광양발전에 기여하는 광양사람이 된 것이다.
정 팀장이 이처럼 광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제가 처음 광양엘 갔더니 툭하면 객지놈에 이 새끼, 저 새끼는 보통이고 갑자기 주먹이 날리며 시비를 붙는 통에 처음에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 어릴 때부터 ‘화랑도’라는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적응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라고 어려웠던 시기를 회상했다.
정 팀장은 “한번은 아내를 희롱하는 두놈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저도 신고를 했고 이 사람들도 맞았다고 신고를 했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광양경찰서의 한 경찰관은 “그때 제가 신고를 받고 갔는데 형님보다 덩치가 두 배나 되는 사람들을 무릎 꿀려놓고 있는 것을 봤는데 그분이 지금의 정구호 팀장님이다” “그때 형님 참 대단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말로 정 팀장의 무술실력을 인정했다.
여러 시련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쨌든 정 팀장은 이제 광양시를 움직이는 중요인사의 한사람으로 자리했다.

프로축구 전남드래곤즈 가족이 되다
정 팀장이 광양만신문을 창간한 것은 사실 정치에 꿈이 있어서였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광양시의원에 출마해 정치를 하고 싶었던 정 팀장은 포스코를 그만두고 보은산업을 운영하면서 대중 앞에 다가서기 쉽고 나름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언론이라 생각하고 광양만신문을 만들었다. 이때가 2003년이었다.
민주당 공천을 받고 싶었던 정 팀장은 경선에서 4표차로 패배하며 결국 출마를 포기해야했다.
“이해에 광양만신문 발행인으로 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회 광양만직장인축구대회’를 처음 개최했는데 이때 대회를 성대하게 성공적으로 주최하는 것을 본 전남드래곤즈 사장이 저의스포츠마케팅능력을 인정해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한달간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축구옆에 있고 싶어 전남드래곤즈에 들어가게 됐다”고 프로축구 전남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정 팀장은 전남드래곤즈에서 경기운영, 대회운영, 예산확보, 언론홍보등의 업무를 맡아 추진하는 구단의 실질적 실세다.
정 팀장이 전남드래곤즈에 들어가 13년간 구단과 함께 적극적으로 지원해 성장한 선수는 유럽리그에서 뛰고 있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공격수 지동원과 찰턴 애슬레틱의 수비수 윤석영이 대표적 인물이며, 국내에는 전북의 이종호를 비롯한 수많은 현역 선수들이 뛰고 있다.
정 팀장은 “시간이 좀더 흐르면 현재 몸담고 있는 전북드래곤즈의 단장도 할 수 있겠지만 60세까지밖에 하지 못합니다.”라며 “그보다는 그전에 충북연고 프로축구팀이 생긴다면 고향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고백했다.

보은, 진정한 여자축구 메카 가능하다
정 팀장은 “보은은 진정한 여자축구의 메카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 생각으로 보은상무를 완전한 보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하프타임 시간에 보은군내 이장들이 나와서 달리기도하고, 축구장에 10만원이든 20만원이든 지역업체의 광고판을 만들어 투자를 유도하면 그들이 후원자고 주인이 되어 응원하러온다.” “선수들도 일요일 같은 경우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학교에 가서 팬 사인회도 하고 축구도 지도해주고 하면 어른들, 학생들, 후원자들이 응원을 하게 되고, 광고수입금은 상무에 후원금으로 지원한다면 주민들이 응원해주고, 후원도해 주는데 어떻게 보은연고의 상무가 발전하고 성적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고 구체적 방법도 알려준다.
13년째 프로축구구단의 살림을 맡아 운영해온 스포츠마케팅의 프로 정구호 홍보마케팅팀장은 “내 고향 보은이 여자축구의 메카로 자리 잡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나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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