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년 만에 온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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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년 만에 온 손님
  • 남 광 우(보은 삼산. 본보 이사)
  • 승인 2016.03.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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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이 대추로 유명한 고장이라면 전라남도 나주는 배로 유명하다. 또한 충청도란 이름이 충주와 청주의 초성에서 따왔듯이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만큼 나주는 조선시대에 곡창지로 꽤나 크고 중요한 고을이었다.

나주에서 손님이 왔다. 나주임씨 백호공파 후손들이다. 그 지방에서 의과대학 교수를 하다가 퇴직하고 목포에서 병원을 하시는 임채준 원장과는 11년 전 본보에 ‘종곡리 마을을 찾아서... 백호 임제가 추앙한 스승, 대곡 성운선생’ 이란 내 기고문이 인연이 되어 때때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나주임씨 백호공파의 도유사를 지내며 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함께 33억 원을 들여 나주시에 ‘백호문학관’을 만드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3년 전 문학관 개관식에 관련 서책과 함께 내게 초대장을 보내주기도 했다.

보름 전 그가 나주임씨 종인 30여명과 함께 보은을 방문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종곡리에 가서 대곡 성운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경기도 포천에 있는 백사 이항복선생을 모신 화산서원까지 간단다. 대곡 성운선생은 나주임씨 백호공파 관조인 임제의 스승이고, 백사 이항복은 나주임씨의 은인이라는 것이다. 임 원장이 종인들과 함께 조상을 지켜준 은인과 조상을 가르친 스승을 찾아 예를 올리고 싶다니 참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다.

백사 이항복은 죽마고우였던 한음 이덕형과 어린 시절 재미난 일화들을 수없이 남긴 분으로 오성이란 호로 더 널리 알려진 분이다. 임진왜란 기에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다. 백호 임제의 아들 임지와 임탄이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에서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에 이르렀을 때 구명하여준 이가 바로 백사 이항복 선생이니 나주 임씨 가문의 은인인 것이다. 당시 이 사건으로 호남의 선비 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조선조 당쟁으로 인한 참혹한 사화였다.

대곡 성운(1497-1579) 또한 을사사화로 형님을 잃은 뒤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보은 종곡으로 들어와 일생을 학처럼 살다간 조선조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와 교유하던 인물만 하더라도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토정 이지함 등 당대의 최고 학자들이었다.

백호임제(1549-1587)는 스무 살에 종곡리로 찾아와 성운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29세에 과거 급제한 후 벼슬에 들어 평안도 도사와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산천을 주유하며 마음껏 사상의 자유로움을 펼친 분이다.

대곡이 청년 임제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보고 쓴 시가 있다.
“少年誰氏子 詩似李將軍 何日重相見 徒勞望北雲”
이 젊은이는 뉘 집 자제인가. 시가 흡사 이 장군 같구나.
어느 날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 부질없이 북쪽 가는 구름만 바라보네.

임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스승이 써준 이 시를 잊지 못한다. 벼슬에 오른 몇 년 뒤 대곡선생의 부음을 들은 그는 ‘백이의 청렴, 유하혜의 온화함을 갖추어 옥처럼 빛나고 금처럼 고우시며, 기러기 먼 하늘 날고 봉이 천길 오르듯 뜻이 높은 경우를 저는 오직 스승에게서만 보았을 뿐' 이라며 ’이제 다시 절 올릴 일도 없어졌으며, (종곡리) 숲 속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일도 다시 찾을 길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적막하고 긴 밤은 침침하니, 이후로는 제 마음 알아줄 이가 없습니다.’라고 절절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나주임씨 백호공파 후손들이 보은엘 오게 된 연유는 이렇듯 관조부인 백호가 스승으로 모신 대곡선생께 예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뜻 깊은 자리에 종곡리 김홍석 이장도 함께 했다. 그들은 가까운 집안 일가친척을 대하듯 이장을 맞으며 종곡풍경이 백호의 글을 통해 본 것과 너무도 같아 마치 오랫동안 살던 고향마을로 느껴진다고 했다. ‘백호문학관’에 꼭 오시라는 인사도 있었다.

조상을 추원경모(追遠敬慕)하는 것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의 연장이다. 그게 다름 아닌 보본사은(報本謝恩)정신이요 보은정신이다. 대곡과 백호간 사제의 연이 사백년의 시간을 넘어 후손으로 하여금 나주와 보은을 이렇게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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