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혈죽도(血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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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혈죽도(血竹圖)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6.01.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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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미모의 장 모 여인이 신안앞바다에서 도굴. 인양된 유물을 대량으로 매입해서 보관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모 특수수사기관과 합동으로 조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기관이 개입한 것은 장모여인이 자꾸 청와대를 팔고 다닌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장 모 여인의 집을 압수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동거인인 K제강 회장의 집 방 한 칸(장모여인의 방)에서 증거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신안앞바다 유물을 비롯한 많은 고서화들이 약 1,500점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안앞바다 유물은 모두 진품이었지만 고서화들은 가짜가 많았다. 그것들은 아주 귀중한 진품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김 모라는 사람의 개인감정서가 붙어있었다. 장모여인이 골동품을 사는데 감정과 소개를 해준 사람이었다. 감정서에는 상당수가 ‘유례가 없이’ ‘진귀한’ ‘국보급’이라는 극찬의 말들이 붙어있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세로로 된 족자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바탕에 생생한 대나무 그림(血竹圖)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신세가 되자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나오는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귀한 그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골동계에서는 예전에 인사동에 나와 돌아다니던 그림이며 가짜라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장여인 역시 1,500여점의 고서화를 김 모씨의 감정과 소개로 한꺼번에 산 것이고 가짜도 많이 섞여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김 모 엉터리감정사의 고서화사기와 같이 취급하여 사건화 되었다.
나는 그 사건의 책임자로서 중심에 있었다. 기자회견이 있던 날, 덕수궁 석조전 1층에 있던 나의 방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가짜 고서화 제작법에 대해서 원판 얇게 떼내는 법, 복사기법, 시골의 썩은 볏짚물로 ‘지다이 내기’, 인영 위조법 등이 소개되면서 김 모씨가 가지고 있던 약 800개의 도장도 공개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혈죽도는 고서화 사기의 대표적 증거물로 기자들에게 소개되었다. 진품 같은 그림이 가짜라는 말을 듣고 기자들은 무엇으로 그려졌느냐? 고 합창했다. 물건 하나하나에 대해서 성분감정을 하지 않고 기자회견에 임했던 나는 순간적으로 “잘 모르겠다. 돼지피로 그려졌는지? 소피로 그려졌는지는... 가짜인 것만은 분명하다”하고 대답을 했다. 그 말이 화근이었다. 기자들은 일제히 “그래 맞다. 돼지피가 좋겠다”하면서 합창을 하였다. 이튿날 거의 전 신문에서는 “돼지피로 그려진 이충무공 가짜 혈죽도” 운운하며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들로 넘쳤다. 이건 아니다 싶었으나 이미 수습할 길은 없었고 ‘돼지피로 그려진 혈죽도’로 확정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이 사건을 회상하는 보도나 글에서 언제나 그렇게 인용되었다.

장 여인의 신안앞바다 유물 불법거래와 연계된 이 사건은 한국의 경제판도를 뒤바꿔놓기 까지 하였다. 그동안 큰 자금들이 부동산에 몰려 있다가 골동품 매입 쪽으로 흘러갔는데 이 가짜고서화 사건 이후 골동계에 찬바람이 일면서 큰손들이 떠나버렸던 것이다.

뒷이야기지만, 장 여인은 그 후 정치권을 등에 업고 사채시장의 큰 손으로 통하면서 거물 사기꾼으로 또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다시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기로 큰돈은 손에 얻지는 못했는지 출옥한 이후에 또 그 일을 계속했으나 이번에는 사기 미수였다. 즉 미처 교환하지 못한 만원짜리 ‘구권’의 거액 정치자금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할인해서 인수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치는 등 그 짓을 버리지는 못했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한다. 장 여인도 늙었는지 그 후 다시는 새로운 뉴스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과욕이 망친 기구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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