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보은을 위해 일할 수 있어 대통령보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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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보은을 위해 일할 수 있어 대통령보다 행복하다”
  • 나기홍 기자
  • 승인 2016.01.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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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사람 - 재경보은군민회 정영기 회장

지난해 12월 17일 다부진 표정에 심금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 보은군민회를 영.호남향우회에 못지 않은 전국제일의 군민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정영기(68 장안 서원) 재경보은군민회 회장 취임사중 일부다. 당당한 목소리 호소력 있는 말이 가슴에 와 닫는다. 언제나 고향 보은을 잊지 못하는 정영기 회장을 만나 그가 걸어온 인생의 뒤안길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졌는지 들어봤다. <편집자 주>

 

먹고 살기위한 청년 정영기의 상경 
정영기!
짧고 깔끔하게 깍은 스포츠머리에 굵고 깊게 파인 주름진 얼굴에서 나오는 온후한 미소, 중저음의 따뜻한 목소리가 매력인 사람.
보은을 떠나 서울에서 살아가는 수만의 출향 보은인을 대표하는 재경보은군민회장이다.
그는 1948년 장안면 서원리에서 부친 고 정길선(90)씨와 모친 고 양기동(88)씨 와의 사이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다 그랬듯이 살림이 참으로 궁핍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야하는데 여행비가 없어서 안 간다고 했다. 당시 보덕중 학생회장을 했는데 회장이 안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친구나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 어린마음에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는 말로 어려웠던 학생기를 회상했다.
정 회장은 속리초와 보덕중을 마치고 1968년 보은농고를 졸업한 후 먹고 살기위해 무일푼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고, 갈 곳도 없는 황량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연명을 해야 했던 그는 막노동과 공장근로자, 책 외판원으로 일하며 2~3년을 보내다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마친 정 회장은 인연이 닿아 호텔에 취직을 하고 서비스업인 관광업계에 종사하며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됐다.

열정을 다한 노조위원장 활동 
정 회장이 서비스업인 광광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곳은 서울 로얄호텔이다.
책임감이 남다르고 성실했던 정 회장은 회사와 동료들로부터 신임을 받아 오다 전국관광노조연맹 로얄호텔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 당시는 노조활동을 하면 빨갱이니 뭐니 사회적 인식이 아주 안 좋던 때여서 많은 고생을 감내해야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6.29선언을 하고 나자 사회 각계에서 강성노조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기 시작했고 기본금 100%인상, 상여금 600%인상 등 무리한 요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로얄호텔 노조위원장이던 정 회장은 이런한 사내 강성노조가 우려되어 오히려 집행부가 선제적이고 합리적인 대안과 인상안을 제시해 단체협약을 이끌어내며 강성노조를 잠재운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리더십을 인정받아 로열호텔 노조위원장을 내리 5선 15년을 역임했고 그 기간 노조조합원들의 권익보호에 열정을 바쳤다.
이후 전국관광노조연맹위원장으로 10년을 더 봉사해 이 분야의 노동운동에 25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정 회장은 “전국관광연맹노조위원장을 하는 바람에 전국의 내로라하는 관광호텔은 모르는 곳이 없고 이때 맺어진 인맥들이 지금 하는 사업에도 큰 힘이 된다.”며 “젊은 나이에 뛰어든 노동운동이지만 내 인생에 있어 정말 값지고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정 회장은 한국노총 간사, 감사, 부위원장, 최저임금심의 위원회, 한국노총 서울시지도위원등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낚시한번 안해 본 사람이 수산물 유통의 리더로 
낚시한번 안 해본 정 회장이 수산물유통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수산물 유통회사인 (주)유엔아이월드를 성장시키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정년을 앞두고 인생 후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 지인이 “정 위원장은 이제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사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아보라”는 말과 함께 일 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준 것이다.
소개를 받은 곳이 노량진수산시장에 입주해 있는 (주)에덴수산으로 정 회장이 맡은 일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영업업무였다.
“처음에 월급을 정하는데 저는 월급은 필요 없고, 매출의 10%를 달라고 했었죠. 사장이 우선당장 월급이 안 나가니 좋아하더라고요.. 그런 조건으로 3~4개월을 하고나니 200여만 원을 받게 됐고 이후 500만 원 가량으로 늘어나다가 1000만 원, 2000만 원으로 늘어나 더군요” 정 회장의 말이다.
정 회장은 관광업계에서 일한 노하우와 인맥을 바탕으로 고급 호텔을 집중 공략해 거래처 확보와 매출을 10배 100배로 키워갔다. 이 무렵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열심히 일했다.
“나중에는 사장이 부담이 되니까 자기가 하던 업체 하나를 저보고 인수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고, 이것을 인수해 시작한 것이 유엔아이월드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주)유엔아이월드 정영기 대표의 놀이터
정 회장이 (주)유엔아이월드를 설립할 2006년 당시만 해도 국내 특급호텔들은 자체수족관을 두고 주문하면 횟감을 그 자리에서 떠서 서비스했는데, 위생뿐만 아니라 서비스 시간과 공간을 많이 필요로 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필렛(오르시)을 활어 몸체에서 뼈 발림부터 진공포장까지 전 과정을 원스톱 처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비용절감과 청결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었다.
이에 착안한 정 회장은 한화 프라자호텔과 63빌딩시티에 이 시스템을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국내 필렛 유통사업의 개척자가 됐다.
현재는 광어, 우럭, 숭어 등 국내 어종뿐만 아니라 연어를 비롯한 수입어종까지 분야를 넓혔다.
(주)유엔아이월드는 80여평의 작업장과 2개의 사무실을 갖고 11명의 종사자가 일하며 인테콘티넨탈, 힐튼, 쉐라톤 등 특급호텔 뿐만 아니라 이랜드계열사, 에슐리퀸즈 등 서울인근은 물론 전주, 익산까지 국내 최고의 회식업체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정 회장은 “최고의 품질과 품격, 신선함과 미각을 주기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 고향을 위해 보탬이 되는 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가겠다.”고 말한다.
정 회장은 좋은 제품을 생산 공급하기위해 67세가 되던 지난해부터 중매인번호 67번으로 직접 경매에 참여하고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다른 어종은 다 전자경매를 하는데 그래도 시장에는 손가락(수지법)으로 하는 것이 시장의 전통이나 풍경, 맛이 살아 있다 해서 활어만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경매를 하는데 이것 참 재미있습니다. 손가락 하나에 돈이 되거든요”
이어 “ 일이 재미있고 하다 보니 노량진수산시장은 정영기 인생에 있어 최고의 놀이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벽 2시면 일어나 3시부터 경매에 참여하고 낮에 1~2시간 잠을 자고, 점심의 각종 약속을 이행하고 또다시 1~2시간 잠을 잔 후 1~2시간 헬스로 건강을 살피고 , 저녁에 거래처 등을 만나고 하는 일상 속에서 잠이라야 하루에 고작 4~5시간 쪼개서 자지만 지치지 않는 것은 그의 열정과 일을 즐기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정영기의 인생 2막 1장 ‘재경보은군민회’ 
정영기 회장의 인생 1막 1장이 고향에서의 청소년기였다면 1막 2장은 직장을 다니며 노동운동을 했을 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지난해 12월 재경보은군민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고향발전에 기여하기위한 인생 2막 1장을 열었다.
그는 취임일성으로 “우리 보은군민회에는 훌륭한 선배님과 뛰어난 후배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영.호남향우회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며 “ 우리 재경 보은군민회를 영.호남향우회에 못지않은 전국제일의 군민회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실제로 그는 이를 위해 원로선배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조직에 착수했으며, 여성회, 청년회도 조직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산악회, 골프회, 장학회, 68동기회 등과도 협조해 사방으로 흩어진 보은군민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 재경보은군민회를 명실상부한 보은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정 회장은 재경보은군민회에 평회원으로 참여를 했었으나 임병옥 역대회장이 취임을 하던 2008년 감사를 맡으며 군민회 임원에 처음으로 합류했다.
이후 2기 4년간 감사로 활동하다 박성수 회장 취임과 함께 수석부회장을 맡아 또다시 4년간 군민회를 위해 봉사했다.
정 회장은 박성수 회장이 8년 후배이지만 그를 깍듯이 모셨고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일을 하는데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지냈고 박성수 회장의 저돌적 추진력에는 존경심마저 든다고 증언한다.
정 회장은 “나를 나아주고 키워준 고향에 참으로 많는 빚을 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고향에 신세를 갚는 것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여된 명령”이라고 말한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작한 정 회장의 인생 2막 1장이 화려하게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나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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