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74】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오늘의 나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설계하는 것은 어떨까.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아니다. ‘일기를 써보라. 그 속에는 반성과 재구성이란 진리가 숨어 있으리니’라고 자신 만만하게 말한다. 시인이 주렴을 들어다 보니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고 옷깃을 풀어헤치니 냇바람에 시원하다. 이러한 때에 청아한 시 한수를 음영했더니 매 구절마다 한가롭기 그지없다고 읊었던 율시 후구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주렴을 들어보니 들에 지난 빗줄기
옷깃을 풀어헤치니 냇바람 시원하고
청아한 시 한 수 읊으니 구절구절 한가롭네.
簾捲野經雨 襟開溪滿風
렴권야경우 금개계만풍
淸吟無一事 句句是閑功
청음무일사 구구시한공
자신을 보며 읊음(自詠)으로 번역해본 율(律)의 후구인 오언율시다. 작자는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1532~1587)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청성산 아래 무민재를 짓고 은거하며 독서를 했다. 만년에 덕이 더욱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이 많았고 유성룡·김성일 등과 친했다. 연시조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등이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주렴을 드니 들에는 지나가는 빗줄기, 옷깃 풀어헤치니 시원한 냇바람. 일없이 청아한 한 수 시를 읊으니, 구절구절 참 이렇게 한가로울 수 없네]라는 시상이다.
전구에서 시인이 읊은 시심은 [모난 성격 홀로 고상함을 지켜, 텅 빈 골짜기에 집 짓고 살지. 숲속엔 벗 찾는 새소리 맑고, 섬돌엔 나풀나풀 쌓인 꽃잎들]이라고 쏟아냈다. 성격도 성격 나름이겠지만 자연이 좋아 자연에 취해 사는 시인의 생활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무렴해도 서애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경기체가 [독락팔곡(獨樂八曲)]에서 세속을 잊고 갈매기와 벗이 되어 사는 즐거움을 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빗줄기나 시원한 바람도 자연과 벗하며 사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다시 시인은 [독락팔곡]에서 서적과 더불어 옛 성현을 벗삼는 즐거움을 노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화자의 심정이 일없이 청아한 시 한 수를 읊조리고 있으니 구절구절이 이렇게 한가로울 수가 없다고 자신의 처지와 심경의 일단을 적절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보면 연시조의 모범을 보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한자와 어구】
簾捲: 주렴을 걷다. 野: 들. 經雨: 지나가는 빗줄기. 襟開: 옷깃을 풀다. 溪: 시내. 滿風: 바람이 가득하다. 곧 ‘시원한 바람’을 뜻함
淸吟: 청아하는 시 한 수를 읊다. 無一事: 일없다. 句句: 구절구절. 是: 이처럼. 閑功: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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