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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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 이 장 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원장
  • 승인 2015.12.0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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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넓은 들판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금색 들판을 뒤덮고 있던 곡식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범인마저 오리무중이다.
여보소! 농부에게 물어봐도 시치미를 뗀다. 파장(罷場)인 가을 태양도 일없이 중천을 떠돌더니 노을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윽고 산사(山寺)에 밤이 찾아왔다.
똑,똑,똑
누가 왔나?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심산 산사를 찾아든 이는 우사(雨師)였다.
그는 낮에만 해도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낙엽들을 잠재우고 도둑같이 이 밤에 찾아들었다.
할 일없는 산개(山犬)도 몸을 말아 주둥이를 박고 자고 있다.
우사(雨師)는 옷이 축 처져 있다. 아마 꽤 먼 길을 걸어 온 모양이다. 무척 피곤해하며 처마 아래 서서 한숨을 쉰다.
집안에는 누가 켜 놓았는지 조그만 호롱불만 깜박이며 희끄무레하게 방안을 비춰주고 있을 뿐 인기척이 없다.
그는 오늘은 비록 초라한 불청객의 몸이지만 전에는 참 잘 나가는 존재였다.
봄에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손님이라 해서 사람들은 얼굴주름을 펴고 반겼다.
그가 보슬보슬 쏟아주는 빗물에 새싹들은 살랑살랑 춤을 추면서 올라와 노래를 불렀으며 긴 겨울을 참고 견뎌온 나무들도 기지개를 펴고 일할 준비들을 시작하였다.

하늘과 땅만 보며 사는 농부들은 가뭄 끝에 찾아온 그를 보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비마중’도 해 주었다.
환대받는 그도 우쭐하며 정말 신이 났었지.
더욱이 식물 성장기에 물이 많이 필요한 여름철에는 번개불칼과 우르르 쾅쾅 뇌성의 도움을 받아 온 대지에 양동이로 들어부어 축복해 주었지. 농수로에는 물이 넘쳐났고 계곡물도 소리를 지르며 생의 노래를 불렀지.
참 좋은 시절이었어.
그러나 금년 여름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하천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
저수지는 수위를 반 이하로 줄였고 아예 바닥을 들어낸 곳도 태반이었다.
바다같이 넓은 비룡저수지 진흙바닥에서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말조개가 목을 움켜잡고 말라죽어갔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원망했다.
그러다가 곡식이 익어갈 무렵에는 농부들은 또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금년 농사는 대풍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풍년축제에 들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은 괜찮지만 내년 농사가 걱정”이라는 한 선지자(?)가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부어라 마셔라, 팔걸이 축배, “내 나이가 어때서?” 등 노래 부르느라 난리들이었다.
우사(雨師)는 바로 그 선지자의 걱정 때문에 늦게나마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기지도 감사하지도 않았다.
만추(晩秋)에 온 불청객은 초라한 꼴을 하고 산사 처마 밑에 서서 떨고 있다.
귀뚜리도 울음소리를 멈추고 더듬이를 돌리며 그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다. 갈 곳 없는 그는 미안해서 더 이상 문을 노크하지 않을 것이다. 산승(山僧)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그렇게 서서 온밤을 지새다 새벽이 오면 돌아갈 것이다.

산승(山僧)은 내다보지 않고 우사(雨師)는 처마 밑에서 떨고 있다.
방안에는 호롱불 하나만 켜져 있다.
이렇게 그들은 각각 긴긴 만추(晩秋)의 밤을 새하얗게 지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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