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할아버지의 행적 장안마을에 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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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할아버지의 행적 장안마을에 세우고 싶습니다”
  • 박진수
  • 승인 2015.11.1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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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사람-동학농민혁명가 후손 배용환(81)옹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입법된 이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을 신청해 장안면 황곡리에 설던 배승기옹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됐다.
현재 장안면 황곡리에 살고 있는 후손 배용환(81)옹은 동학유족의 후손으로 이제 손자들에게도 증조부의 동학 참여에 대해 떳떳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사 교과서의 논쟁을 보면서 바로 잡아야 할 역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죽기전 할아버지를 홍보할 수 있는 전시관이 설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동학유족 배용환옹을 만났다. <편집자주>

▲ 동학농민혁명의 후손 장안면 황곡리 배용환옹.
배용환옹의 증조부 배승기 할아버지는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에 참여하였으며 돈론. 우금치 전투에 참전한 후 북실전투에서 전사했음을 인정받았고 유족으로는 손자 배춘근씨와 손녀 배순근, 배송자씨가 보은에 살고 있다.
유족 등록후 할아버지의 동학 참여에 대해 후손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동학농민혁명의 후손 배용환씨 먼저 선대 조상님들에 대해 그리고 동학혁명과의 연관 관계에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배씨 집안은 삼한갑족의 후예로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전 보은 장안에 정착한 이래로 현재까지 생활해오고 있습니다. 저의 8대조, 7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에 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후 후손들의 벼슬길이 막혀 향반으로 생활하는 처지의 몰락 양반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880년대 그 당시 시대상황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투와 지방관리, 토호들의 탐학과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여 민심을 흉흉하고 민초들의 삶은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척왜양창의 기치아래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새로운 세계의 구현을 위해 동학의 2대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중심이 되어 1893년 3월 보은장안에서 동학교도 및 농민등 3만여명이 넘는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이 당시에 보은장안 황곡에서 몰락양반가로서 삶을 이어오시던 우리 고조부님와 증조부님께서 왜놈들의 경제적, 정치적 침투와 타락한 지방관리들의 착취와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동학집회에 동참하시게 되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 선대분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1892년 외속리면 장안마을에 대도소가 세워지면서 모여드는 동학도들이 유숙할 곳을 찾게 되었고 당시 황곡리에 살고 계시던 고조부님(致中)을 만나 시국에 대해 논하시게 되었고 동학도들로부터 청조문(請助文), 즉 부정부패로부터 백성을 주제하시고 밀려드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뜻을 담고 있는 문건을 받고 함께 동참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청조문을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광화문 복합상소때에도 참석하시고 동학도들에게 잠자리는 물론 군량미, 군수전을 공급하시고 고조모께서는 주먹밥을 지어 날랐다고 합니다.
또 보은 장내리에 집결한 6만의 동학농민혁명군이 출전할때는 고조부께서 35살의 승기 할아버지는 외아들이었지만 주저함이 없이 출전시키셨고 그 이후 동학농민군과 함께 활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증조부님의 종제인 승자 현자 할아버지께서는 이러한 반외세의 동학정신을 이어받아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당시 의병투쟁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동학교도 또는 동학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위 난군, 난군의 가족으로 몰려 관과 지방토호들로부터 멸시와 학대등을 받고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재산도 강제로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동학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후손들은 도망 다니며 숨어살아야 했고 말도 못하는등 난군의 후손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를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증조부님의 아들이신 영자선자 할아버지께서는 거의 평생을 벙어리로 살다시피 하셨고 일자무식의 농부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이처럼 동학혁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동학난으로 불리어질때는 한스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 훌륭하신 선조들의 후손으로 더할 수 없는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신 조부님의 장손으로 할일을 하게 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여 눈물이 앞을 가릴 뿐입니다. 명예로운 동학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최근 선조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있으며 경주 배씨 대동합보에 조상님들의 함자를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 선조들의 행적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이 사실을 증조부님과 고조부님께서 아신다면 이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후손으로 바람이 있다면 우리 선대들께서 300여년전 지금의 장안면 장안마을에 오셔서 동학이라는 혁명을 맞이하고 이로 인한 역사적 사실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기념사업이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에 있어 장안집회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갑오년 1년전 우리마을에서는 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지식층, 농민 할 것 없이 수많은 백성이 모여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의 깃발을 내걸고 부패한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선조들의 의로운 행동이 있었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런 곳에 기념비 하나 없다는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조속한 시일내에 장안마을이 동학의 고장으로 동학의 역사적 현장으로 태어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 동학참여자로 등록된 증조부 배승기 할아버지를 족보에 올릴 수 있었다며 후손들에게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리고 싶다는 배용환 옹.
동학농민혁명은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삶의 신호탄이었으며 그 정신은 조선말 의병항쟁과 3.1 만세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고 나아가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운 독립군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투쟁의 원동력이였으며 1970, 80년대의 반독재 운동의 정신으로 면면이 이어져 이 시대 우리가 지키고 선창해야할 소중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사 논란을 지켜보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봉기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배용환 옹은 선비의 정신으로 의로운 삶을 살았던 분들의 희생이 결코 왜곡되어서는 안되며 일본이 남기고간 한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한편 심의위원회에서는 법에서 규정한 유족등록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 연구사업, 기념시설건립, 유적지 정비, 주요지도자 서훈, 기념일 제정, 기념상 제정,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바른 인식 확산을 위한 선양사업 등을 진행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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