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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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 김종례(시인)
  • 승인 2015.11.1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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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을 하기 위해 거실문을 드르륵 열고 현관으로 나갔다. 한평 남짓한 공간 구석마다 웅크리고 밤을 지샌 이런저런 수확물들이 출근하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어젯밤에 옆집 부산댁이 따다 준 조롱박 세 개가 서리 맞은 잎새를 축 늘어뜨린 채 뒹굴고 있는 모습. 남편이 등불을 동원해서 높다란 감나무에서 끌어내린 월하시 한 소쿠리, 땅주인에게 되돌려 준다고 갖다놓은 땅콩자루, 들깨자루, 콩자루 삼총사가 신고식을 하는 듯이 나란히 주저앉아 빤히 올려다보니 참 신통방통하다.
신음소리 그득하던 숲도 진통을 거두느라 잠잠해지고, 쪼르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다람쥐 입에도 도토리 하나 물렸다. 사람들도 여름내내 마당이나 들판에서 씨름하던 얘들을 하나 둘 집안으로 들여놓는 일로 참 분주한 요즘이다. 논둑 밭둑에서 구름떼마냥 뻗어가던 호박넝쿨 속에는 꿀단지 같은 늙은 호박이 숨어있고, 밭고랑 한 쪽에서는 알이 차가고 있는 배추 무들이 세월을 재촉한다. 이랑을 넘나들던 진녹빛 넝쿨 아래서 누렇게 본체를 드러내는 고구마도 내 눈에는 황금덩이다. 집집마다 마음에 활력소가 되어주던 얘들을 갈무리하느라 야단법석 소란스러운 요즘이다. 핏기가신 빈 들판은 4막4장 연극을 막 마친 무대처럼 고요하지만, 회춘의 소망을 품었으니 오히려 충만하니 만선이 되었다. 땀과 정성을 흠뻑 쏟아놓은 주인에게 수십 배 수백 배의 열매를 다시 돌려주며, 저리도 달려오는 동장군을 맞이할 채비를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을 어루만지며 잠시의 여백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당 가득히 피어나 위로를 주던 오만가지 꽃들도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힌 지가 오래다. 나도 서둘러 꽃씨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는 요즘이다. 칸나 천리향, 쟈스민, 다리아, 튜울립 등 알뿌리를 캐서 거실로 이사를 시켜야 비로소 마당 갈무리가 끝나지만... 어디 그 뿐이랴! 집집마다 대추 호박꼬지 무말랭이 옥수수들이 햇볕 따스한 곳에서 쪼글쪼글 말라가는 풍경은 참으로 소박하고 정겹기가 그지없다. 집집마다 황토빛으로 충만해 지고 있는 거실에 한 아름 억새풀로 마지막 장식을 하고나면, 가을의 뒤꽁무니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던 뜨락마다 백치같은 첫눈은 또 소리없이 내릴 것이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물건이나 농산물 갈무리에만 정신을 쏟고 있을 때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갑자기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늘 깨어 있으라.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그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중략) 잠에 취하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 이번 주말에는 오랫동안 뜸했던 애들 집을 방문하여 한바탕 잔소리라도 늘어놓을 예정이다. 그리도 힘들고 분주하기만 했던 자식 갈무리로 한 세월이 어디론가 훌쩍 흘러갔건만, 알 수 없는 부모의 사랑 놀음을 다시 반복할 마음은 또 무엇일까? 도적같이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을 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우리네 인생은 저 빈 들판처럼 잠시의 여백이 아니라, 영면을 향하여 가는 진부한 삶이기 때문이리라... 어영부영 뒷짐을 짚고 인생 갈무리에 우물쭈물 하다가는 자칫‘내 그럴 줄 알았지’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한 잎 낙엽이기 때문이리라...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 몇 개 매달려 산모롱이 내려다보며 그리움을 익히는 늦가을! 계절을 몰고 오느라 취기 올랐던 동구 밖 느티나무도 점점 사위어가며 우수수 울분을 터뜨리고, 숨어 울던 바람소리에 피어난 들국화도 마지막 잎새 떨구느라 잔뜩 움츠려든다. 자연과 우주와 소멸의 이치를 아다지오로 노래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저녁, 사람들에게 갈무리의 원리를 깨달으라고 일러주던 늦가을이 산등성이로 후루룩 후루룩 날아가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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