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도랑 속에 끊기는 것은 감수할지언정 : 題畵松 / 사숙재 강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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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도랑 속에 끊기는 것은 감수할지언정 : 題畵松 / 사숙재 강희맹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 승인 2015.08.2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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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57】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는 사군자는 아닐지라도 소나무는 대나무와 더불어 굳은 절개를 나타냈다.
그래서 소나무의 기상을 노래하거나 담담한 모습을 그림 속에 담는 화가들이 많았다. 사숙제도 묵화쯤이야 거침없이 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훌쩍 커버린 소나무가 숱한 우레와 풍상을 겪어내면서 훤칠하게 자랐겠지만 화가의 붓 끝으로 태어나는 그림은 될지언정 기둥과 들보가 되어서야 어디 되겠느냐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題畵松(제화송) / 사숙재 강희맹
깊은 산속 태어나서 만장이나 큰 나무
우레와 그 풍상을 몇 번이나 겪었을까
붓도랑 속 감내할지언정 들보 기둥 원치 않네.
生長深山萬丈長 幾經雷雨與風霜
생장심산만장장 기경뢰우여풍상
終然甘作溝中斷 不願殘形擬棟樑
종연감작구중단 불원잔형의동량

붓도랑 속에 끊기는 것은 감수할지언정(題畵松)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다. 그는 다른 호로 운송거사(雲松居士)ㆍ만송강(萬松岡)으로 했다. 이조판서, 좌찬성을 지냈고 경사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 ≪세조실록≫, ≪동국여지승람≫ 편찬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깊은 산 속에 나서 만 장이나 커졌으니, 우레와 풍상을 몇 번이나 겪었을까. 끝내 붓도랑 속에 끊기는 것은 감수할지언정, 들보와 기둥으로 남은 꼴은 원치 않겠지]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소나무 그림 화제를 붙이며]로 번역된다. 글쓴이의 다른 아호인 운송거사(雲松居士)ㆍ만송강(萬松岡) 등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절개 굳은 소나무를 좋아했다. 잎이 시들지 않고 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살리라는 곧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이 시인은 자식이나 친지 자제들의 교육용으로 사용하려는 도자설(盜子說)을 읽어 보면 한갓 하잘 것은 도둑 아비가 도둑질하는 방법을 그 자식에게 가르치는 과정의 이야기에서 절묘한 학습방법을 찾게도 된다. 위 시의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도 위에 지적한 도자설과 무관하지는 않는다.
화자는 온갖 풍상과 인고의 아픔, 매서운 추위를 참으며 자란 소나무를 작자 자신에 비유하고 있다. 다시 화자는 들보와 기둥이라는 동량(棟樑)에 연연하지 않고 생명이 다하여 붓도랑에 꺾이는 소나무가 되는 것도 감수할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단종을 몰아내고 흉흉했던 인심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자와 어구】
生長: 나다. 크다. 深山: 깊은 산속. 萬丈長: 만장이나 크다. 幾經: 몇 번이나 겪다. 雷雨: 우레. 與: ~과. 더불어. 風霜: 풍상. 바람과 서리.
終: 끝내. 然甘作: 그렇게 짓는 것을 감수하다. 溝中斷: 도랑 가운데 끊어지다. 不願: 원치 않는다. 殘形: 남는 꼴. 擬棟樑: 기둥과 들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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