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 : 贈洪娘詩 / 고죽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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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 : 贈洪娘詩 / 고죽 최경창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 승인 2015.08.1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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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56】
고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가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용서치 않았다. 홍랑은 함경도, 평안도 주민의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양계지금(兩界之禁)법을 어겼고, 고죽은 국모 인순왕후 청송 심씨가 훙서(薨逝)한 국상 중에 첩을 들인 죄였다. 이 사건은 조선 중기사회를 뒤흔든 최고의 러브스캔들로 장안의 입방아에 오래 오르내렸다. 둘은 다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홍랑의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에 화답하는 고죽이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贈洪娘詩(증홍랑시) / 고죽 최경창
서로를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나니
지금은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리
구름비 청산 어두우리. 함관령은 불지마소.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상간맥맥증유난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막창함관구시곡 지금운우암청산

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贈洪娘詩)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으로 홍랑의 시문 [묏버들 가려 꺾어]에 답한 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서로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나니, 지금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리.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디 부르지 마소, 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홍랑의 시조에 답해서 주다]로 번역된다. 두 시인의 연모지정이 국익을 손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선조의 특명으로 복직된 고죽은 종성부사로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객사하니 45세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고죽의 무덤 앞에 손수 초막을 짓고 3년간 두문불출하며 시묘살이를 했다. 여인이 심산유곡에서 시묘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랑은 얼굴을 심하게 훼손시켜서 뭇 남성의 접근을 막았고 숯덩이를 삼켜 스스로 불구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문집만을 챙겨 해주 최씨 문중에 전한 뒤 자취를 감췄다. 수년 후 홍랑은 고죽의 묘 앞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런 연유로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고죽유고’가 전해지고 삼당시인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시문에 나온 ‘함관령 옛 노래’는 함흥과 홍원 사이에 있는 고개로 홍랑이 읊은 이별시 말한다.
후손들은 고죽의 무덤(부인 선산 임씨와 합장) 앞에 자좌오향(정남향)으로 홍랑을 묻었다. 고죽은 전남 영암 태생으로 해동공자로 일컫는 최충(984~1068)의 18대손인으로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해주 최씨 선산(先山) 발치에 함께 묻혀 있다.
【한자와 어구】
相看: 서로 바라보다. 脈脈: 맥맥히. 贈幽蘭: 그윽한 난초를 드리다. 此去: 지금 가다. 天涯: 하늘 끝으로. 幾日還: 어느 날에 돌아올까.
莫唱: 부르지 말라. 咸關: 함관령. 함남 함주군과 홍원군 사이의 고개. 舊時曲: 옛적의 노래. 至今: 지금. 雲雨: 구름과 비. 暗靑山: 청산이 어두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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