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이 남는다면 : 夢魂 / 숙원 이옥봉 (여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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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이 남는다면 : 夢魂 / 숙원 이옥봉 (여류시인)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 승인 2015.06.25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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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50】
임 그리는 여인은 그리움으로 기다려진다. 요즈음 같으면 전화도 하고 영상 메시지도 보낼 수 있으련만 조선 여심(女心)은 제도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하물며 본부인이 아니고 첩이나 기생의 신분이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전제군주정치하의 관습이었다. 혼자만이 보고픈 마음을 달랬다. 꿈길에서나마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했다. 조선 3대 여류 시객의 한 사람이 이런 마음을 담아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夢魂(몽혼) / 숙원 이옥봉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은 잘 계신지요
달 비친 비단 창가 슬픔만 깊어가니
반쯤은 모래 되었겠네, 꿈속 걷던 문 앞돌길.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근래안부문여하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약사몽혼행유적 문전석로반성사

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이 남는다면(夢魂)으로 번역되는 칠언절구다. 작자는 숙원(淑媛) 이옥봉(李玉峰)으로 여류시인이다. 1550년대 후반에 태어나,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0년대 초 35세가량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기록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주검은 비참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요즘도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은 잘 계신지요 , 달 비친 비단 창가에 제 슬픔이 깊습니다. 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이 남는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의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꿈 속의 영혼]으로 번역된다. 글쓴이는 왕실 종친으로 옥천 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시문에 총명했다. 부친은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아껴,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사대부 가문 문과에 급제한 조원(趙瑗:1544~1595)의 소실로 들여보냈다. 조원은 여염집 아녀자가 시를 짓는 건 정숙한 일이 못 된다고 하면서 시를 짓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인다.
단란하게 살던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이를테면 필화사건이었다. 소박을 맞아 쫓겨난 시인은 뚝섬 근처에서 방을 얻어 살았는데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위 시를 쓴다.
화자는 안부를 묻고 난 후 달 비친 창가에 깊었던 슬픔을 하소연하고 꿈속에서 몇 번이고 임의 대문 앞을 서성인다. 서성인 발길 흔적이 땅 위에 남았다고 하면 아마 문 앞에 깔려있는 돌길 반절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화자의 기막힌 자기 한을 쏟아 내고 있다.
【한자와 어구】
近來: 요즈음. 근래. 安否: 안부. 問如何: 어떠한지. 곧 잘 계신지. 月到: 달이 비치다. 紗窓: 비단 창가. 妾恨多: 첩의 슬픔 깊다.
若: 만약. 使: ~으로 하여금. 夢魂: 꿈속. 行有跡: 다녔던 흔적이 있다. 門前: 문전 앞. 石路: 돌길. 半: 절반은. 成沙: 모래가 되다. 모래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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