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지어보니 그것 참, 돈 안 되더라”
상태바
“농사 지어보니 그것 참, 돈 안 되더라”
  • 나기홍 기자
  • 승인 2015.03.12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기이사람 - 고향을 사랑하는 박종만 씨의 ‘귀향가’
19년 묵은 고물 엘란트라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하게 살면서 모교를 사랑하고 동창들과 이웃을 배려와 존중으로 대하며 작지만 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귀향인, 모든 것이 작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내세울 것이 못된다며 지역민과 어우렁 더우렁 보람되게 살아가는 회남면 남대문리 박종만(62)씨,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편집자 주>


회남면 남대문리에서 청주시 문의방향으로 차를 몰고가다보면 우측 언덕위에 잘 가꾸어진 대추나무밭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는 ‘무적해병농장’ 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마당을 들어서면 쓰는 차인지 못 쓰는 차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고물 승용차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박종만씨의 애마 1996년식 앨란트라다.
한눈에 봐도 이 농장 주인이 부지런하고 무척이나 검소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집 여기저기 놓여있는 농기구와 구석구석 쌓여있는 농산물에서는 넉넉함도 느낄 수 있다.

44년만의 그리운 귀향
박 씨가 고향 회남에 들어온 것은 3년 전인 2012년이다.
박 씨는 직장을 다니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3000평의 산을 틈틈이 일구었다.
여기에 대추500주, 밤나무, 감나무를 심었고 퇴직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돈 보다도 고향에 들어와 고향의 친구들, 선후배들과 살고 싶어서였다.
“농사를 지어보니 정말 소득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어유, 인건비, 비료비, 농약비등 운영비를 빼고 나면 기가 막혀, 농사짓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농사의 어려움을 말한다.
“작년에 대추를 1톤 정도 따고 밤도 1톤 가량 했는데 일부는 팔구 일부는 친구들 나누어주고 하여간 돈은 헛일여~ 그래도 재미는 있어유”
그래도 재미는 있다는 박 씨의 말에서 그가 귀농인이 아닌 귀촌인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다행히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평생을 다녀 꼭 농사가 아니라도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씨는 1955년 회남면 신추리에서 출생해 회남초(31)와 회인중(4회)을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어린나이에 객지를 전전하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이일 저일,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하던 박 씨는 군 입대 나이가 되자 해병대 하사관에 자원입대해 7년간의 장기하사생활을 하게 된다.
군에서 제대한 후 박 씨는 신탄진에 있는 한국타이어에 입사해 25년 8개월간 근무 후 지난 2012년 12월 평생을 바친 직장을 퇴직하고 고향를 찾아 남대문리에 정착했다.

지역사랑, 어울림의 미학
박 씨는 고향에 들어오기 1년전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개인 돈 500만원을 출연해 동창회 겸 회남면민 경로잔치를 회남초에서 개최한 것이다.
쉬울듯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고향의 어른들을 모시고 즐거움을 드리고자 했던 평소의 마음을 실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동창회의 결속은 물론 지역 어르신들께 커다란 즐거움을 드릴 수 있었다.
대청호환경파수꾼으로 잘 알려진 그의 죽마고우 김기동씨는 “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나있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고향에 있었고 친구가 진심에서 우러나서 동창회를 주관하면서 어른들까지 모시고 경로잔치를 한 것은 사회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추켜세웠다.
박씨의 선행은 계속됐다.
그는 2013년 12월에 종자돈 100만원을 모교인 회남초에 장학금으로 출연하고 매월 10만원씩 이체해 장학금을 마련해 오고 있다.
이 장학금으로 올 2월 17일 졸업식에 2명 졸업하는데 20만원씩 장학금주고 입학식 때에도 입학생 4명 전원에게 학용품이라도 사 쓰라고 5만원씩 20만원을 지원했다.
박씨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학생들에게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더 많은 금액을 주고 싶지만 자금이 아주 없으면 안되니까 이정도 밖에 못했는데 아무것도 아녀, 그냥 맘이여 맘”이라는 말로 겸손해한다.
박씨의 동창사랑은 정평이 나있다.
박씨는 회남초 31회 동창회장을 5년째 맡고 있다.
유명무실했던 동창회는 박 씨가 회장을 맡고나서 최고의 활성화를 이루어냈다.
그가 동창회를 활성화시킨 것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희생을 통해서였다.
“회비 3만원을 걷어서 저녁 먹고 나면 돈이 적자여 그러면 어떻게? 내가 7~80만원을 개인적으로 내야지, 그러면 어떤 친구는 고맙게, 어떤 친구는 저자식 뭐하는 겨? 하는 친구도 있더라” “동창들 애사에 조화를 보내는데 어떤 해는 1년에 22개까지 나가더라구유, 다 제가 냈어유”
어느 조직이든 지도자의 자기희생이 없을 수 없다는 아주 간단한 상식을 상식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박씨의 자기희생과 동창사랑으로 동창회를 개최하면 30여명이 참석을 하게 됐다.
박씨의 동창 김기동(회남 신곡)씨는 “동창회에 30명이 나오면 원만한 시골학교 총동문회인원여~, 이 친구가 열심히 하니까 다들 따라 오더라”라고 증언했다.


▲ 박종만 최태숙씨 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대추나무 전지를 하고 있다.
고마운 울 마누라, 다 당신 덕이여~
박씨는 자신이 귀향해 이처럼 모교나 동창, 지역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할수 있는 것은 순전히 부인 최태숙(58세)씨 덕분이라고 처음으로 자랑을 한다.
“아 글쎄 동창회를 하면 애들(동창)이 한30명은 오는데 좀 많이 먹어야지, 저녁 먹여야지, 삼겹살 먹여야지, 보신탕 끓여야지, 술취한놈 주정하지 그래도 집사람이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늘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친구들이 맘 편히 오잖아 울 마누라 정말 고마운 사람여~”라고 너털을 떤다. 그속에 진심이 녹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씨가 부인을 만난 것은 해병대 하사로 진해에 근무할 당시로 첫눈에 꽂혀 연애를 하다가 1980년에 결혼을 했다.
결혼 1년만에 얻은 아들(34)도 며느리와 함께 “아버지, 이제 100세 시대인데 소득도 없으면서 친구들 퍼주고 하시다가 어떻게 하시려구 하세요” 라고 걱정을하면서도 “보기는 좋네요. 아버지 편하신대로 하세요 제가 좀 도와드릴께요”하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한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친구와 이웃, 고향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 착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일해야 하고 싶은 것 할수있다
귀향해 농사를 지으면서 소득은 별볼일 없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맘 편히 살아가는 박씨도 어릴적 가난은 피해갈수 없었다.
그는 회남면 신추리의 가난한 농군의 5남매 중 둘째로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일자무식이었지만 늘 선하게 살면서 이웃을 배려하며 살았다고 한다.
박씨가 늦었지만 이웃을 배려하고, 친구를 위하며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아버지로부터 이어오는 선한 가풍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형제들이 다 밥은 먹고 살지만 어릴때는 무지 가난했어요. 중학교 다닐때 학교에가면 2시간쯤 끝나면 기성회비 가져오라고 집으로 보내요. 그러면 집에 올 수는 없고 해서 집에 오다가 송평 앞에서도 놀구, 죽암 말바우에서 놀다가 뼈룩재 산길을 넘어 늦게 집에오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는 얼마나 가난이 서러웠던지 몰라” 라고 어릴적 가난을 말했다.
박씨는 농사가 경쟁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한다면 농사도 짓도 틈틈이 막노동이든 계약직이든 일을 해서 외부에서 돈을 벌어들여야 지역경제가 살고 친구들에게 밥도 사구,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좀 주고 할수 있다고 말한다.
박씨는 “나는 스타일이 노는 스타일이 아니다. 벌기위해서는 도둑질 빼고는 다 하랬다구 비정규직이든 막노동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서 이웃과 함께 어우렁 더우렁 살아가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나기홍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