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이웃 돌보는데 남은인생 바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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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웃 돌보는데 남은인생 바치겠다”
  • 나기홍 기자
  • 승인 2015.03.0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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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강윤중 회장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 하기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17세 소년 강윤중,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청년은 보은실업 대표로, 한부모가정 봉사단체인 재혼로뎀나무 대표로, 재경속리초동문회 회장을 맡아 역동적으로 살아가며 성공한 실업가로, 존경받는 사회인으로 보은인 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50년전,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강윤중(67) 회장의 인생여정을 들어 봤다 <편집자 주>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속리초등학교 동문회들이 지난 1월 24일 재경속리초 동문회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회장에 강윤중(29회) 보은실업 대표가 취임했다.
신년회를 겸한 이날 행사장 입구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동문들의 안내속에 300여명의 동문들이 참석해 수십 명이 행사장에 앉지 못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초대회장을 맡은 강윤중 회장은 누구일까?

“너무도 불편했던 ‘가난’ ”
강 회장은 1949년 충북 영동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5살에 조상대대로 살아와 원래 고향인 장안면 장안2리로 이사 온 후에 17세까지 살았다.
대부분 어렵게 살았던 시대였지만 어린 시절 강회장의 집은 유독 어려워 부모님 명의로 된 논도, 밭도, 집도 없었다.
강 회장은 고구마, 감자, 메밀풀대를 주식으로 할 정도로 어렵긴 했으나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아주 굶지는 않았다.
속리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보은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는 집에서 보은중학교까지 왕복 16~18킬로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다녔다.
책가방이 없어 하늘색 책보에 책을 싸서 다니다보면 모서리 진 부분이 늘 헤어지고 찢어지기 일쑤였다.
당시에 학생들 중 부잣집 자녀는 보은읍내에서 하숙을 했고 그 다음은 새 자전거로, 그 다음은 중고 자전거로, 아주 가난한 집의 자녀는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중고자전거 가격이 1500원 정도로 고추 몇 근, 마늘 몇 접만 내다팔면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지만 강회장의 가정은 이마저도 없이 가난했다.
강 회장은 일찍 철이 들었다. 남들 같으면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으련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질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다. 어차피 조른다고 될 형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그때였다.
“장안서 보은까지 8~9킬로 거리쯤 되는데 중고자전거라도 있었으면 신나게 다녔을 텐데 걸어가는 내 곁을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동창생이나 선.후배를 볼 때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 그때 아! 가난한 것이 이렇게 불편한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보은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강 회장은 보은농고에 합격을 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눈물을 머금고 고교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여기서 가난이 이만큼 불편하다는 것을 눈물로, 가슴으로 또다시 느꼈다.

“성공이 아닌 먹고살길을 찾아 출향”

고교진학을 포기한 강 회장은 선병국가옥에 있는 서당엘 다녔으나 이 역시 학비부담 때문에 그만둬야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공부를 계속하기는 어렵고 고향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1965년 11월 25일, 먹고살길 찾아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장안을 떠나야 했다. 사촌형님에게 부탁해서 대구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월급도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약 2년간 대구의 시계점에서 일을 하던 강 회장은 주인이나 선배 점원이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자 출향 2년 만인 1967년 대구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19세 청년 강윤중은 시계점에서 청소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부지런히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10여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인 명동에서 근무하며 일류 시계기술자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 명동의 일류기술자가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생각해보니 이 역시 남의 집 직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 회장은 남의 밑에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내 기술로 노점상을 하든 리어카를 끌든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78년에 4년 반 동안 착실하게 저축하여 모은 자본금 300여만 원으로 은평구에 ‘장안당’이라는 상호로 개업을 하고 독립을 했다.
돈이 없어 고가의 시계나 금. 은을 들여놓을 수 없어 처음에는 시계수리 위주로 일을 했다.
워낙 솜씨가 좋은데다 꼼꼼하고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다보니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가게 진열대에 물건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쯤 일하던 1981년 강 회장은 스스로 깜짝 놀랐다.

“독립하기 전 내 한 달 월급이 15만원 정도였는데 한 달에 100만원이 들어오더라고요.
이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눈물이 나더라”며 그때의 감동을 회상했다.

군에서 제대 후에 취직하기 위한 면접에 입고 나갈 옷을 살 돈이 없어서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었다. 겨울이불 하나로 사계절을 살아갈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거의 모든 것을 참아내며 월급을 3년간 꼬박 모든 돈이 100만원 이었었다. 그 100만원을 이제는 한 달에 벌다니,,,,,,,불과 4, 5년 전에 있었던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감동이 벅차올랐다.
3년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한 달 만에 벌어들이는 사업가가 된 것이다.

“다시 시작한 공부, 그 즐거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강 회장은 34세 되던 1982년도에 가난 때문에 하지 못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모교인 보은중학교에 졸업증명서를 떼러갔더니 재학시절 계시던 박영갑 선생님이 교감으로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서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업에 성공해서 대학 나온 사람을 직원으로 쓰라고 하신 것이 가슴에 와 닿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어요”

고등학교 졸업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강 회장은 졸업할 때 졸업생 262명중 차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원 없는 고교생활을 통해 눈물로 학업을 포기해야했던 한을 모두 풀었다.
강 회장은 경복고부설 방송통신고에서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학생회 위주로 움직이는 학교의 특성을 살려 학교신문을 창간했고, 개교 후 처음으로 수학여행도 시행했고, 교가도 만들고, 기독학생회도 창립하며 학생회의 활성화와 학교의 위상을 높였다. 이런 것을 인정받아서 EBS 방송국에서 강회장 한사람을 주제로 한 “영원한 방통인”이라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인 최영섭 교수에게 부탁해 곡을 받고 아동문학가 조대현 선생이 작사한 교가를 제정하고 반포한 그 교가가 지금도 불리고 있다.
그때 결성한 기독교학생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예배를 보고 있다고 한다.
원 없는 고교생활, 멋있는 고교생활을 통해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인 37세에 고교졸업장을 받는 기쁨을 얻게 됐다.
강 회장의 학구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7년 사이버대학인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에 입학해 끈질기게 노력해 사회복지학을 전공, 우수한 성적으로 3년 만에 조기졸업하며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아동보육교사, 건강가정사 등 국가자격 4개를 획득했다.
강 회장은 “한번해보지 뭐 하고 시작한 대학공부가 국가자격 4개를 얻었고 사회복지학과 112명 중 수석으로 졸업을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체수석을 노려볼걸 그랬어. 하하하”하며 보람을 말했다.
정말 원 없이 멋있게 가난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한을 푼 그는 또다시 64세에 아세아연합신대학교에서 석사과정 마쳤고 지금은 한영신학대학교에서 상담학철학박사 과정을 밟으며 끝없는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성공 뒤 이어지는 이웃사랑”

강 회장은 서울 은평구 한자리에서 ‘장안당’을 30년간 운영했다.
한 3년 하다가 명동으로 다시 나가려 한 것이 열심히 하다 보니 장사도 잘되어서 개업 10년 만에 옆 점포를 합치고 또 10년 만에 뒤 점포를 합치고 또다시 10년 이렇게 한자리에서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를 이룬 강 회장은 사업시작 30년만인 2007년 ‘장안당’을 정리하고 부동산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전원주택을 하려고 땅을 사두었는데 주택을 짓기에는 땅값이 너무 올라있어 공장을 지어서 임대사업을 시작했어요” 라고 두 번째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말한다.
강 회장은 모두 4곳에 공장과 빌딩을 소유하고 각각 신촌실업, 무아실업, 예실실업, 보은실업이라는 부동산 임대 및 관리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강 회장은 “가난이 축복”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철이 일찍 들어서 절약하며 열심히 일하게 되었고, 가난했기 때문에 장안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의 고통을 딛고 성공한 것 같은 강 회장에게도 두 번의 이혼이라는 뼈저린 아픔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혼과 사별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삶의 어려움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난관을 잘 극복하고 땀의 열매를 풍성하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문제와 해답을 찾아가며 이들을 돕는 것에 대해서 10여년간 연구하고 조사했다. 홀로 당당하게 잘 사는 방법과 행복한 재혼을 위해서는 준비하고 분별력을 키우고 자기계발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세운 봉사기관이 ‘재혼로뎀나무’이다.
이 기관은 국민일보 제정 “2014년 기독교교육 브랜드대상” 을 받았다.

이어 “재혼로뎀나무”라고 하니까 재혼을 시켜주는 것만이 목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행복한 재혼하기는 물론, 현실과 미래를 직시하며 성공하는 인생으로 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상담하고 교육해 주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성공하기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먹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50년의 세월!
그는 하고 싶던 공부도 했고, 불편했던 가난을 극복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80세부터일 것” 이라고 말하는 강 회장은 “재혼로뎀나무”의 법인전환과 힘들고 외로웠지만 끈질기게 발전을 추구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역정을 책으로 역어내는 것이 올해의 목표다.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공부와 봉사의 삶을 멈추지 않을 것” 이라고 한다.
67세에도 꿈을 꾸는 강윤중 회장은 앞으로 어떤 꿈을 꿀까.

/나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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