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이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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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이백분
  • 김 종 례 (시인)
  • 승인 2014.11.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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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밤이 가고 구르몽의 낙엽이 빈 의자를 맴돌던 어느 주말, 여성행정 연수일에 있었던 일이다. 경복궁 만추의 모습을 담는 일정을 끝으로 귀가하는 시간에 있었던 짧은 단상이다. 나는 광화문 앞에서 일행과 헤어져 시집간 딸네 집으로 향하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가을 향연에 흠뻑 취하라고 폴폴폴 왈츠를 추어대는 은행잎 가로수에 홀려서 무작정 걸었다. 일행도 떠나고 가족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거리다. 고풍스러운 고궁의 담벼락을 혼자 타박타박 걸으며 오랜만에 가져보는 호젓한 시간이다. <어휴, 이게 정말 얼마만인 휴식인지....> 착각의 타임머신을 발동시켜 소녀시절마냥 은행잎 비를 맞으며, 잊혀진 가수의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걸었다. 때맞춰 휴대폰까지 찌리리 꺼져버리는 소리에 가슴이 탁 트이면서 안도의 숨을 돌리는 절호의 순간이다. 한참 걷다보니 짙푸른 기와지붕이 눈앞에 차오르면서 경찰 버스들이 은행나무 터널아래 늘어서 있고, 사사육육 짝을 진 경호원들이 목각인형처럼 거리를 행진한다. <어휴, 여기가 거긴거여?> 바리게이트 앞에서 중국여행객 일행이 떠들썩하니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나는 저 푸른 지붕 아래서 사색하고 고민하는 여성대통령에게 잠시 경의를 표하고, 갔던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어릴 적 읽었던 <왕자와 거지>의 일생을 떠올리며 다시 타임머신에 올라탔다. 한참 걷다 보니 다시 광화문 앞이다. 몇 발짝 앞에서 호떡장수 수레가 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는 게 너무도 편한 찰나다. <하나 주세요> 1,500원을 준 호떡을 한입 베는 순간, <어휴, 무슨 맛이 이래?> 단맛은 하나도 없고 부풀어 오른 국시 꽁뎅이 덤덤한 맛에 인상이 찌그러든다. 여고시절 먹었던 꿀맛 같은 호떡을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세월무상이 서글퍼지면서 돌아오지 못할 아름다운 시절 옛사람 옛정이 몹시도 그리웠다. <지하철을 타야하는데?>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밀가루맛 호떡을 씹으며 정처없이 걷는 이 즐거움을 누가 공감할까 싶었다. 낯선 거리에서도 서먹하지 않은 이 자유로움에 동행해 줄 그 누구가 아쉬웠다. 시골 아줌마 행색을 제대로 하면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기쁨을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었다. 휴대폰도 멍멍이고 공중전화 박스도 보이지 않아 애들과 연락이 두절된 게 몸이 닳았지만, 그런대로 모든 필름이 끊어진 상황에서의 공지혜는 스릴 그 자체였다. 아무와도 소통이 안 되는 이 멍멍한 시간이 왜 이리 기쁨을 준단 말인가! 가도가도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 30분 남짓 돌아다니던 중, 청와대 경호버스 옆 간이 쓰레기봉투에 반토막 호떡을 툭 던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줌마 뭐에요?> 아들같은 경호원이 버러지 쳐다보듯 질책을 하며 바라본다. 그래도 나는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찾아 헤매도 쓰레기통 하나 없는 이 거리에 휴지 한 장이 안보이니 기분이 좋아서요. 은행잎 엽서만 팔랑팔랑~~ 이리저리 아름답네요 ㅎㅎ> 나는 영문 모를 웃음을 다시 보내고 지하철로 향하였다. 물어물어 세 번이나 갈아타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은 9호선의 풍경도 궁중속의 고독 그 자체이다. 휴대폰 속으로 자신만의 공간에 빠져들어 도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독서삼매 대신 손폰 삼매중인 무표정한 그들과 동석하여 잠시 함께 흔들거렸다. 목적지인 노들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지상으로 오르는 중, 등 뒤에서 <엄마!> 하는 걱정스럽고 앙칼진 딸의 목소리에 이백분 타임머신은 나를 무심하게 내려놓고 어디론가 휙 날아가 버렸다. 다시 일상의 걱정과 관습에 침몰하는 격동의 순간이다. 느닷없이 영화 <만추>가 생각나는 이 우수의 계절 늦가을! 주인공 여죄수가 7년만의 외박휴가가 그 얼마나 애툿 했으면 초면수작에 마음을 주었을지 오늘 다시 공감이 간다. 일 년 만에 가져 본 이백분 남짓한 자유시간도 그렇게 홀가분하고 짜릿했으니 어찌~~어찌 아니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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