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 訪金居士野居 / 삼봉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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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 訪金居士野居 / 삼봉 정도전
  • 장 희 구(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 승인 2014.11.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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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2】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문학적 학문적으로 서로 넘나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객들은 모두가 시문과 역사에 능통했다. 동지를 만나도, 친지를 만나도, 대화가 통하는 여인을 만나도 거침없이 시문을 수창(酬唱)했다.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정객(政客) 한 사람이었지만 한국화 한 폭을 그리듯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일궈 낸 시 한 편을 만난다. 마지막 결구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만나는 멋진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訪金居士野居(방김거사야거) /삼봉 정도전
가을 구름 몽실 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었어라
말 세워 돌아갈 길 묻노니, 그림 속이 내 몸인가.
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추음막막사산공 락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圖中
입마계교문귀로 불지신재화도중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訪金居士野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저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고려 말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져놓았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가을 구름 몽실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어라 /시내 다리에서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 묻노라니 /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라는 시상이다.
김거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라도 나주 인근에 사는 어떤 식자로 추정된다. 삼봉이 34~36세 시절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한 친원파의 세력에 눌려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소재동(消災洞)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고 전하는데, 그 때 쓴 시 28수가 [금남잡영(錦南雜詠)]에 묶여 있다.
시인은 김 거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어느덧 시냇가 다리 앞에 와 섰다. 올 때에는 집을 찾느라 보지 못한 늦가을 오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쪽빛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고 사이의 산은 인적이 없이 텅 빈 듯 고요하다. 바람 없는 적막 속에 한 잎 두 잎 소리 없이 낙엽은 지고 있다. [아, 어느새 단풍이 수북이 쌓인 만추의 한 가운데에 내가 오똑이 서 있구나]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화자가 한 폭의 그림 속에 홀린 듯이 말을 타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고 보면 ‘김 거사는 화중지인(畵中之人)이 아닌가!’라고도 하면서…
【한자와 어구】
秋陰: 가을의 구름 낀 하늘. 漠漠: 몽실몽실하다. 空: 한적하다, 고적하다. 落葉: 낙엽. 無聲: 소리 없다. 滿地紅: 온 땅이 가득 붉다. 立馬: 달리던 말을 세우다. 溪橋: 시내 다리. 問歸路: 돌아갈 길을 묻다. 不知: 알지 못하겠네. 身在: 몸이 ~에 있다. ?圖中: 그림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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