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부인들 건강을 위해 호박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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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부인들 건강을 위해 호박 생산"
  • 송진선
  • 승인 1999.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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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에서 호박재배하는 강치원씨(마로 소여)
허구 많은 농작물 중 왜 하필 호박 농사를 지을까, 소득이 높은 것도 아닌데, 더욱이 폐광지역에 외딴집,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마로면 소여리의 강치원씨(59)를 만나러 가는 길은 덜컹 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2km이상 달려야만 했다. 탄광이 있었던 곳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음산하기 그지없고 두려움에 머리 끝이 쭈뼛하게 설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만 보이는 곳. 강원도 두메산골 같은 산중턱에 위치한 그의 집. 헛간을 차지하고 있는 크고 작은 누런 호박들을 보니까 과연 호박왕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시골 안방의 시렁에 열 개 남짓의 호박이 올려져 있던 우리네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다. 강씨가 마로면 소여리까지들어와 호박농사를 짓게된 이유를 실타래처럼 풀어놓는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18살 되던 해 경북 봉화로 이사, 그 곳에서 재산을 몸땅 날린 후 울산에서 배 만드는 일을 하다, 대전으로 이사, 목수를 하다 이것도 여의치 않아 금강수계에서 살면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했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80호인 정도되는 탄광마을인 마로면 소여리로 무작정 찾아 들어왔다.

그 때가 79년 12월, 허허벌판에 포장치고 살 정도이니까 그의 말대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남의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냉지였기 때문에 특별히 지을 만한 것이 없어 배추, 무, 참깨 등을 농사, 보은시장으로 판매를 다녔다. 처음에는 리어커, 나중에는 경운기가 판매수단이었다. 80리 길을 10년이상 리어커와 경운기로 판매를 다녔을 정도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 탓인지 이사온 이듬해 700평의 땅을 구입했다. 또 폐광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땅을 사기 시작해 지금은 3000평에 이르고 90년부터 논을 과수원으로 개간해 그곳에 사과나무와 배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어린 사과나무 사이에 심기 시작한 호박이 지금은 남들이 버리고 간 3000평에 모두 심어 연간 1톤 트럭 10차분량 이상을 수확한다. 95년에는 1톤 트럭도 구입해 전국으로 호박 직거래에 나섰다. 다 팔아야 250만원정도, 그것도 전국을 쏘다니면서 팔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 접을 듯도 한데 강씨는 "전국의 부인들의 건강을 위해 호박농사를 짓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97년 도 농산물 품평회에서 동상까지 차지한 바 있고 올해는 한 개에 28kg나 되는 호박을 생산했을 정도로 호박에 일가견이 있는 강치원씨는 요즘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에 마음이 급하다.

얼기 전에 모두 팔아야 하기 때문에 고정 단골의 알선으로 매일 청주, 대전, 안산 등 동서팔방을 다닌다. 지금은 다 떠나고 강치원씨 네 두내외만 살고 있는 소여2리의 진입로 포장이 숙원이라고 말하는 강치원씨. 그의 단골에게 누렇게 잘익은 호박을 안겨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강씨는 부인 이봉순씨(59)와의 사이에 1남5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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