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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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즐거움
  • 김철순 / 시인
  • 승인 2014.10.0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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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약국은 면소재지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조제약국이다. 병원이 2층에 있고, 그 밑에 우리 약국이 있다. 우리 약국엔 병원에 들렀다가 오는 어르신들의 쉼터가 된다. 율무차와 커피 자판기가 있어 공짜로 제공되기 때문인지, 지나가던 어르신도 맛있는 율무차 한 잔 마시고 가겠다며 들어오신다.
내가 하는 일은 처방전을 컴퓨터에 입력하거나, 매직으로 약 봉투에 커다랗게 이름을 쓰고 무슨 약이라든가 며칠치의 약인가를 써주는 일이다. 컴퓨터에 입력을 하면 약 봉투에 인쇄되어 나오지만, 어르신들은 눈이 어둡기 때문에 큰 글씨로 다시 써주어야 한다.
토요일까지 근무를 해서 힘은 들지만, 공부하랴 글 쓰랴 시간에 쫓기지만, 약국 일을 하면서 집에만 있을 땐 몰랐던 사람 사는 모습이 보인다.
셋째 아들을 업고 자전거까지 타며 씩씩하게 다니는 사람 좋은 지애 엄마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잘한다. 뭐 도와줄게 없냐며, 힘쓰는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딸에게 먹이겠다고 비타민을 사간 아저씨가 이번에도 딸에게 먹이겠다고 청심환을 달라고 하신다. 어떤 게 좋으냐며 꼼꼼하게 물어보시고 가격까지 따져보고 어렵게 구입을 하신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마친 딸아이가, 호주까지 유학을 다녀온 딸아이가 취직을 못하고 놀아서 많이 속이 상했는데, 이번에 취직이 되었다며 좋아하신다. 그래서 딸에게 이것저것 먹여주고 싶은가 보다. 몸이 약한 거 같아서 비타민을 먹이고 싶고, 놀란 거 같아서 청심환을 먹여보고 싶다고 한다. 그게 부모 마음이리라.
어떤 아주머니는 자기 몸도 성치 않아서 절뚝거리면서 귀가 어두운 시동생을 극진히 보살핀다. 늘 같이 다니면서 시동생의 귀가 되어준다. 의료급여 1종이라 약값이 공짜인 어떤 할머니는 공손히 약봉투를 받아 가시면서 미안해하신다. 약을 맛있게 지어달라고 농담을 건네는 아저씨, 혈압과 당뇨가 있으신 어르신들, 평생 지은 농사일로 허리나 다리가 아프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아는 어르신들이 많다. 내 부모님 같은 어르신들이다. 거친 손마디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잘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아프셨던 아버지는 안 계신다. 이렇게 좋은 약이 많은데 말이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손님들 중에 현서 엄마나 지민이 엄마처럼 젊은 새댁도 있다. 현서 엄마는 아들 둘을 키우는데 아기들이 감기에 걸려 자주 들른다. 마음도 착해서 시어머니에게 드릴 거라며 약상자에 비상약을 꼼꼼히 챙겨서 가져갔다. 아들 딸 쌍둥이를 키우는 지민이 엄마는 11월이 산달이라며 배가 부르다. 시아버지와 약을 지으러 와서 서로 약값을 내겠다며 다투는(?) 착한 지민이 엄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있다. 어렸을 적 2~3년 도회지 생활을 한 것 빼고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젊었을 땐 도회지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나고 자란 이곳에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인이 ‘나를 만든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지만, 나를 만든 건 거의가 고향 산천이다. 내가 자연을 노래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 나이에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고향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철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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