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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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연
  • 김영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위원 공학박사)
  • 승인 2014.06.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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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위원 공학박사)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다보면 이제는 옛 사진첩을 펼쳐야 기억나는 얼굴들이 까닭 모르게 정겹게 다가온다. 그 중에 한 일본인의 모습도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인천 건설기술교육원에 세를 살던 시절인 내가 입사한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1984년 4월 초,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일본 동경 고쿠분지시(國分寺市)에 있는 ‘전국건설연수센터’에서 열리는 열흘 남짓한 ‘지반조사기술(地盤調査技術)’ 연수과정에 참가했다.

30여 명이 참가한 연수 과정에 한국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일본인 다섯 명과 한 조가 되어 기숙사의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다.

연수를 마치던 날, 함께 연수를 받은 시즈크다씨가 내게 다가와 손목을 끌었다.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호기심도 나고 재미있을 것도 같아 그를 따라 동경 인근 사이타마(埼玉)현 히키군(比企郡)의 작은 마을에 있는 그의 단독주택을 방문했다. 활짝 핀 시기는 지났지만 온통 벚꽃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퍽 아름다웠다.

처음 본 나를 반갑게 맞이한 그의 부인은 어떤 일본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일본어를 배운지 석 달 남짓한 내가 어떻게 일본 음식의 종류를 헤아릴 수 있으랴. 곰곰 생각하던 나는 일본어학원에서 들은 적 있는 ‘스키야키’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때까지 스키야키를 본 적도, 먹어 본 경험도 없었다. 부인은 시장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나가 시장을 봐 왔다. 맥주와 스키야키와 몇몇 일본 음식을 저녁으로 내놓았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실 때 온돌이 아닌 다다미방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콧물을 훌쩍거리는 그의 두 살 난 딸애가 그림책을 가지고 와서 내게 물었다.
“난데스까(이게 뭐야?)”
나는 겨우 코끼리와 원숭이만을 일본어로 알려 줄 수 있었다. 일본어로 동물이름이라도 몇 개 더 외워서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잘 때가 되니 시즈크다씨가 2층 부부용 침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다다미방도 괜찮다고 몇 번 사양했지만 그는 기어이 깨끗한 시트가 펼쳐진 부부 침대에서 나를 잠자게 하였다. 그들은 1층 다다미방에서 잤다.

이튿날 오전 그의 집을 나서며 인사를 나눌 때 갑자기 두 살 난 딸애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젯밤 짧은 시간 그림책을 같이 보며 놀았다고 헤어지기가 못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동경의 호텔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머릿속이 좀 복잡해졌다.
우리에게는 빨갱이만큼이나 모질게 느껴지던 일본인이 아니었던가. 곰곰 생각도 해 보았다. ‘인천 건설기술교육원에서 나와 한 열흘 같이 생활하였다고 동남아에서 온 어떤 사람을 우리 집으로 초청하는 게 쉬운 일일까?’ 설령 초청한다고 하더라도 식사나 대접하지 잠까지 재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귀국 후 나는 일본어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그해 연말, 일본어 편지책까지 보면서 쓴 일본어 편지를 그의 집으로 보냈다. 또 한 번 실수를 했다. 편지 끝에 ‘카시코’라고 썼더니 그건 여성들이 쓰는 말이고, 남자들은 ‘케이구(敬具)’라고 쓴다는 답장이 왔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1996년 12월 북해도대학(北海道大學) 저온과학연구소(低溫科學硏究所)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 다음 해 4월, 일본어가 조금 늘었다는 생각에 사이타마현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물었다. 부부는 내 일본어가 향상되었다며 반가워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한 번 사이타마현 그의 집으로 안부 전화를 했다. 그의 부인이 받았는데 목소리가 어두웠다. “얼마 전, 남편이 후쿠오카(福岡) 출장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전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였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이 오면 나는 사이타마현 작은 마을의 친절했던 일본인 가족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려 보곤 한다. 그리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 밤하늘의 작은 별 같은 존재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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