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을 하루같이 봉사 외길 걸어온 집배원 윤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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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을 하루같이 봉사 외길 걸어온 집배원 윤봉수
  • 나기홍 기자
  • 승인 2014.03.06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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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수(보은우체국 우편물류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픈 때나 하루도 빠짐없이 우편집배원이란 외길을 달려온 지 어언 28년이 됐다. 어린 시절, 되물림 된 가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던 집배원의 생활이었지만 반백이 다된 지금이 돼서야 “암만 생각해도 이 직업을 택한 것이 참 잘한 일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이기도 하다.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며 많을 때는 1200통의 고지서 등을 배달하는 그는 남들보다 훨씬 부지런해야 하는 집배원 생활을 통해 스스로 터득된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직업인으로의 자부심마저 느낀다고 했다. 2년 전 겨울, 오토바이를 타고 공무 중에 보은읍 수정리 인근에서 눈에 미끄러지는 사고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맞은 적도 있다. 그러나 오로지 성실한 우편지킴이로, 지치지 않는 이웃에 대한 사랑봉사와 나눔 실천의 봉사자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본분을 다하며 천직으로 알고 꿋꿋이 활동하고 있는 우편집배원 윤봉수(56)씨를 만났다. 〈편집자 주〉

중학교졸업 전 삼승파출소지서 사환으로 사회 첫걸음
그는 삼승면 내막리 출신으로 판동초(3회)를 거쳐 현재는 속리산중으로 통합된 원남중을 졸업했다.
“중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한 이웃의 소개로 삼승파출소지서 사환으로 일한 것이 처음이었어요. 5년 후 그것을 밑천삼아 원남우체국 도급요원으로 입사했어요. 당시, 전화가 없던 시절, 마을에 긴급연락망 전화가 한 대 씩만 있었어요. 다급한 소식을 전하려면 꼭 전보를 해야 했어요. 전보가 바로 전화역할을 한 셈이죠. 시간을 다투는 전보배달 일을 하자니 어린나이로 투정한번 못하고 어려움이 많았지요. 겨울이나 여름에는 눈이나 비가 많이 올라치면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악천후 속에서 40~50분을 걸어 배달을 해야 했어요. 어린마음에도 급한 전보를 가정에 전달해야 한다는 그런 사명감이 존재해 있었던 것 같아요.”
첩첩두메산골로 연애편지 배달할 때가 가장 큰 기쁨
“지금은 사라진 머 언 풍속도 같지만 당시는 청춘남녀들의 연애편지가 우편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넘쳤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쌓여대는 연애편지 때문에 더 열심히 일을 다녀야 했지요. 후속답장을 기다리는 청춘들은 가슴을 설레며 특히 아가씨들이 반가운 마음으로 저를 기다리곤 했어요. 반갑게 반겨줄 때는 이까짓 고생이 무어 대수이랴 싶었지요. 주로 밤에 배달 일을 했는데 그만큼 위험도 항상 뒤따랐어요. 배달지역도 옛날엔 첩첩 두메산골인 청성면 대안리, 능월, 도곡, 마장리 등으로 달랑 손에는 플래시 하나만 들고 다녔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되도록 몸은 힘들었지만 편지의 주인공인 아가씨가 편지를 받아들고 함빡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때는 마치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지요.(웃음)”
가난한 집안 형편 속 고교진학 포기했을 때를 회고
어머니 김홍태(80)씨의 2남2녀 중 차남이었던 그는 유달리 가난했던 집안형편 속에서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중학교만 졸업한 채 마음에서 그냥 포기했다.
당시는 달리 어찌할 수도 없는 어려운 형편으로 혼자만 학교를 다니는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담으로 그래도 우편집배원의 길을 걸어온 것이 지금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단다.
“어머니가 광주리에 생선을 이고 종일 가가호호 팔러 다니셨어요. 4명의 자식들 뒷바라지에 희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학교진학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처음 집배원 시절, 보통 걸어서 40~50분씩 걷는 것은 다반사였지요. 그러나 감히 힘들다고 내색한 일도 없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로만 생각됐어요. 지금은 여든이 되신 어머니가 연세도 무색하리만큼 건강하셔서 무척 감사할 따름이지요. 아직도 일한 습성 탓인지 옥천서 과일가게를 하시는 어머니가 무척 자랑스러울 때가 많아요.”

회남우체국 시절, 수몰민인 독거노인 대상 약, 반찬 심부름도
지난 1986년 회남우체국 시절, 오토바이로 전선에 나서며 시시때때로 수몰민의 아픔이 가슴에 젖어오는 계기가 많았다고 회고하는 그다.
“독거노인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시작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보람으로 삼고 약이나 반찬 심부름에서부터 쌀, 반찬 등을 지원해 오고 있어요. 당시 지금은 학교가 없어졌지만 많아야 전교생 열댓 명 되던 은운리 소재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공책을 사주었던 추억도 있네요, 5년간의 봉직 속에서 세월의 변화에 원남우체국 합병으로 보은우체국으로 옮겨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어요. 집배원 생활을 하다보면 저 뿐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집배원들은 산골에서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이 많아 도와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매사 불편함을 호소하는 일이 많거든요. 이밖에도 벌에 쏘여 위험한 학생들 구조에서부터 화재가 난 주택 신고까지 집배원들이 하는 일이 참 많아요.”

배달하던 중 주택화재 막아 손실 줄인 무용담도
“일전에는 삼승면 송죽리로 배달을 나가던 중 한 주택 창문으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 생각할 틈도 없이 사람이 없다고 판단, 집으로 뛰어들어 연기로 가득 찬 집안을 둘러보니 가스레인지에서 시커멓게 탄 냄비가 포착, 불을 부어 큰 화재를 막은 적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러한 일들을 통해 큰 일이 나기 전에 예방을 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기도 합니다.”

암 투병으로 좌절서 다시 희망으로 입양이 큰 소망
지난 2010년 그에게는 또다시 운명 같은 날이 찾아왔다. 동네주민 5명과 건강검진을 했던 그는 암 2기를 선고 받고 한 달 후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수술을 받고 4년이 흘렀다.
“지금도 6개월마다 한번 씩 건강 검진을 가요, 5년 이내에는 재발확률이 있어 관리에 심혈을 쏟고 있지요. 좋아진 건강이지만 조심하고 있어요. 또한 2년 전 당한 다리사고로 걷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아 일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꼭 하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언제나 내조를 아끼지 않는 아내(김연순·54)와 의논을 이미 마쳤어요.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더라구요, 건강에 자신이 생기면 곧바로 아이를 입양할 계획이지요.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 질 것 같아요. 아내가 처음에는 너무 고생해서 이젠 안 시키고 싶다고 반대를 하더군요, 그러나 설득 끝에 이제는 허락을 내려줘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어요. 자식은 1남 1녀를 두었어요. 모두 잘 성장해 주어 고맙고 대견하지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잘 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하곤 해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우편집배원으로, 이웃을 돕는 수호천사로 쉴 틈 없이 바쁘지만 보람 속에서 사는 인생만이 신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는 오늘도 힘차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꿈을 실어 나르는 수호천사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나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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