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무사고·버스오지노선 개척자로 종횡무진한 억척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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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무사고·버스오지노선 개척자로 종횡무진한 억척 인생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4.02.27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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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오지노선 개척자 방인식(보은읍 교사리)옹
‘버스오지노선의 개척자’, ‘60년 무사고경력’이란 수식어를 훈장으로 간직한 억척 인생이 있다. 여든이 넘어선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며느리가 새로 마련해준 자동차로 여기저기 소싯적에 일궈놓은 버스오지노선 행적을 되밟으며 보람을 찾고 있는 그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찾아낸 오지노선이기에 애착도 남다르다. 그 길을 따라 버스가 통행하는 것을 보면 천하를 얻은 듯 뿌듯함을 느낀다는 그는 50~60년대 관내 버스 등 6대 차량밖에 없었을 당시부터 운전해온 전문베테랑이다. 이런 남다른 이력을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던 날, 용화로 가는 중에 진창에 빠진 자동차를 끌어내기 위해 밤새워 사투를 벌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온다는 방인식(82·보은읍 교사리 90-13·60년 무사고경력)옹을 만나 파란만장했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팔십 인생에서 회고하는 당시의 무용담 값진 추억
그는 오히려 관내 자동차가 귀했을 당시 옥천 등의 지역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할 때 “돈 벌기가 식은 죽 먹기였다”는 무용담을 털어놓았을 정도다.
당시 하루 3회 정도 운행을 반복하고 나면 거짓말 안 보태서 돈을 보따리로 싸야 할 정도로 흘러넘쳤다는 회고를 하면서 웃음 짓는 그다.
팔십 인생에서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는 그에게는 없던 길을 뚫으며 겪어야 했던 숱한 고생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혀 지지 않는 악몽이자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보은~용화 구간 등 5곳 개발’은 고생한 눈물의 대가
“당시 완행버스(한성운수)가 다니던 시절이었지요. 고생을 무릅쓰고 오지노선을 개척하고 자 부리나케 다닌 노선이라면 먼저, 보은~용화 간, 보은~장선~안내~옥천 간, 보은~중티~청주 간, 보은~고승~탄부, 보은~내북 등 다섯 개 구간입니다. 한성운수 재직시절, 오지노선 개척자로 이름 석 자를 올린 것은 순전히 인생에 대한 치열함 때문이었어요. 용화 가는 길에 또랑을 건너지 못해 가마니로 막고 운행했던 그 순간에 흘린 눈물은 역시 고생의 대가겠지요. 아마 오지노선 개척자로 등재된 사람은 저를 포함 전국에 걸쳐 10~15명 안쪽일 겁니다. 당시 오지노선 개척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사람은 당시 유재철 충북도의원을 빼놓을 수 없지요. 올해로 60년 무사고를 깨끗이 마감하는 기분이 드네요.”

단독 오지노선 통한 환자배송, 시장 봐주기 서비스 실천
“당시 운수업을 지금 세월에 비한다면 안 될 말이지요. 당시 용화구간은 나의 단독구간이었어요. 늦은 밤, 맹장이 터진 환자이송을 맡는 것에서부터 낮에는 시장가서 반찬거리를 사서 이름표를 달아 정유소에 갖다놓으면 그것을 가져가는 등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던 시절이었지요. 지금 같으면 누가 길에 쓰러져 있다 해도 그냥 지나치는 비정한 세상이 됐지만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자동차가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던 주민이 감자, 옥수수 등 먹을 것을 가지고 와 격려해 주며 차를 뺄 수 있도록 도움 주었던 그 때가 그립네요.”

당시 박기종 국회의원 차량운전 도맡아 피발령 재 넘기도
“운전할 당시, 지역에서 안전운전하면 항상 저를 제일로 꼽아주던 인물로 지역구가 보은인 국회의원인 박기종 의원이 있었지요. 일화를 들자면 옛날 피발령 고개를 넘어 청주를 다녀오려면 운전자의 많은 주의가 필요했던 난코스이기도 했지요. 그런 코스를 밤이나 낮이나 저를 믿고 안전운전을 당부하면서도 피발령재를 쉴 새 없이 넘나들었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정치와 연관 맺었던 15년 세월이 빠르게 흘러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네요.”

한성운수 청주영업소장에서 본사상무로 취임 퇴직
“사회적 활동으로는 당시 청주소재인 한성운수에 차량지입 절차로 운수업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한 대였다가 나중엔 두 대가 됐어요. 11년 쯤 지난 1976년 경 기업으로 묶이는 바람에 차량지입제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다시 청주영업소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청주개척을 하느니 차라리 내려가 고향에서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해 보은영업소로 내려와 근무했어요. 당시 영업소장을 지낼 때 지금의 민음사 운영하는 박맹호씨와는 절친 사이였어요. 그 후 1980년, 본사상무이사로 취임, 재직하다가 퇴직했어요, 당시 시대적 상황이 1982년인가요, 충북에서는 괴산을 포함 개인택시 지원대상자 2명에 25년 무사고운전자인 내가 선정됐어요. 개인택시를 무상배급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당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도에 부탁하는 바람에 순순히 양도했으며 지금까지 택시양수증 만 기념으로 갖고 있어요. 당시에는 10년 무사고 운전자에게는 개인택시 면허혜택도 있었지요.”

63년 만에 6.25참전 공비소탕작전 참여 국가유공자로 인정
“1t 화물트럭 5대, 축산업 자가용 등을 운영하던 지난 1983년 버스사업을 접었어요. 또한 63년 만에 어렵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영예도 얻었어요. 18세 때 6.25참전을 하면서 당시 공비소탕작전에 참여, 63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어요. 바로 산외면 유공자탑이 그 증거예요. 또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무사고로 2대를 받는 등의 혜택도 있었어요. 오지개척한 곳은 모두 합쳐 5곳으로 주로 보은영업소장 시절에 많은 개척을 하였어요. 인생에서 정이 들면 어디든 고향이라고 했잖아요.”

2남2녀의 뒷바라지 끝나고 2년 전 편안한 일상으로 복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힘든 인생이었지만 자녀들이 순탄하게 성장해주어 고맙게 생각해요. 지역에서 양돈업을 하는 둘째아들(방희진 양돈협회장)이 잘하고 있어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돼요. 21세에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손녀만 9명이네요, 인생에서 이만한 결과는 극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늘 생각 속에서 사업 구상을 짜 맞추느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어요. 이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말 머리를 텅 비우며 살고 있어요. 그렇게 복잡했던 순간들을 넘기며 자식들 뒷바라지해온 세월이 마치 꿈속처럼 생각됩니다. 뱃속까지 시원해진 것은 2년 밖에 안 됩니다. 사업조종하고 애들 대학졸업 시키고 무려 10년간 자식들 뒷바라지에 노력해왔어요.”

둘째며느리에 경로당통한 효 사상 일깨워 효부로 자리매김
“자식들의 효도와 관련, 재미난 일화가 있네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 9년 후배였던 박종기 군수시절, 아들농장에서 새끼돼지 7~8마리를 각 경로당에 분양시킨 적이 있어요. 새끼를 키워 효에 필요한 종자돈을 만들기 위한 것이죠. 지금생각하면 경로사상 고취를 위한 시작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둘째며느리가 지금까지 경로당에 그냥 오는 법이 없어요. 봉투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작년에는 양돈업 하는 둘째아들이 지역 내 330개 경로당에 5㎏씩 돼지고기를 보내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 효 감사이벤트를 매년 실시해오고 있어요. 동네주민들의 입으로 전하는 말은 ‘착한 며느리’란 소문이라네요. 효 실천도 부모가 자꾸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냥 내버려두면 자식들은 효와는 점점 멀어지는 인간상이 되어 마음을 섭섭하게 해도 양심을 느끼지 않는 답니다.”
인생 팔십 고개에서 돌아본 그의 벅찬 보람은 어려운 시절, 역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서 통행하며 버스오지노선을 개발했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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