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한(限) 풀기위해 선택한 19년의 김장봉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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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한(限) 풀기위해 선택한 19년의 김장봉사인생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3.11.28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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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영(마로면 오천리)씨
‘눈물겨운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결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로 마음이 바짝 오그라드는 계절, 고아원이나 양로시설, 독거노인 등 외롭고 힘든 소외계층이 살고 있는 곳에는 더더욱 마음의 체감온도가 떨어지는 때다. 이기주의로 만연된 세태 속에서 갈수록 줄고 있는 온정의 손길이 아쉬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김장을 담가 선뜻 내어준 부부가 있다. 무려 19년간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손수 농사지은 무, 배추, 고추 등으로 김장을 담가 사랑의 수은주를 올려온 주인공들이다. 바로 마로면 오천리의 이승영(69)·어복식(68)씨 부부로 가난 속에서도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김장봉사를 실천해온 이들 부부에게 허심탄회한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베트남 전쟁 포탄 속보다 더 무서운 것 배고픔
“빗발치듯 날아오는 베트남 전쟁의 포탄 속보다도 더욱 맵고 참기 힘든 것이 바로 배고픔이었다”는 그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덩그러니 남겨진 5남매에게 가장 참기 힘든 것 역시 가난으로 인해 당시 먹을 것이 없어 삶을 지탱할 수 없었던 때”라고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니 뭐니 해도 인생을 살면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역시 배고픔이란 놈입디다. 3일 굶어 남의 담 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란 옛말이 실감났을 때가 바로 엊그제 같아요. 그래서 자연스레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알게 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비록 작은 일이지만 아내와 의논하여 더 못한 이웃을 위해 일 년 식량인 김장을 담가주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아내와 내가 선택한 제2의 인생 전환점이기도 했어요.”

독거노인 등 소외이웃에 김장봉사로 제2인생 전환
지난 1966년 8월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그는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3세 때 모친을 잃고 그 이듬해 부친마저 잃는 인생의 큰 시련을 겪었다.
“형제들이 많다보니 호구지책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그런 속에서 겨우 초등학교(세중초)만 졸업할 수 있었어요. 마치 세상 속에 내던져진 가녀린 새들 같았어요.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커져만 갔어요. 먹는 것이 절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던 때였으니까요. 춘기병기중대 운전병 시절이었어요. 우연히 베트남 참전병에 대한 정보를 들었어요. 가난을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번에 참전 결정을 했어요. 당시는 그렇게라도 돈 벌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목숨 거는 것보다도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약 45만 원정도 손에 쥐게 되는 일에 막연한 희망마저 걸었던 것 같아요. 감히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못했지요.”

생명은 건졌으나 고엽제로 인한 평생 지병 얻어
“1년 만에 살아 돌아온 나는 베트남 참전 탓에 고엽제로 인한 평생 지병을 얻게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인생 선택으로 후회는 없어요. 한국에 돌아온 지 3년 동안은 죽을 것 같은 정신적 신체적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다 아팠어요. 병 고치기 위해 안 해 본 것 없이 다해봤지요. 전국적으로 병 고칠 수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다니며 고치려고 노력도 해봤어요, 당장 수면도 취할 수 없었고 다리는 벌벌 떨려 서있을 수조차 없어 그냥 집에서만 힘들게 버티고 있을 정도였어요. 큰 병에는 소문을 많이 내라는 말이 있듯 마침 당질 조카가 소개해준 당시 대전 진잠리 소재 산중턱에 있었던 이북출신 한의사의 침술에 의해 병을 다행히 잡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잠도 잘 수 있게 되고 그나마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된 겁니다.”

가난 이기려 종답농사·광산·운전 등 안 해본 일 없어
“나이 26세 때 수한면 장선리의 이씨 종가 집 딸이었던 아내를 한동네 살고 있던 친척의 소개로 만났지요. 지금 생각하면 인연도 그런 인연이 없지요. 어려운 살림을 일으키고자 서로 논의한 끝에 종답을 빌려 담배농사를 10년 넘게 지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농사로 돈 버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궁여지책으로 당시 원정리 소재 광산업소에 들어가려 하자 나이 많다고 탓을 해 당시 조합장이었던 이향래 전군수의 도움으로 그곳서 일을 하게 되었지요. 운전도 해보고 안 해 본 것 없이 다하다 보니 조금씩 전답이 사 모여지더군요.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당시는 남들보다 잘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이 넘쳐났어요. 고생한 이야기를 책으로 묶으면 아마도 여러 권의 책이 만들어지겠지요.”

김장담그는 일은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은혜 갚기 위해 시작
“다행히 2남3녀의 자녀들 중 셋은 공무원으로, 딸은 만화가로 잘 풀렸어요. 가끔씩 아이들이 용돈을 손에 쥐어주면 아내는 그 돈으로 좋은 마늘을 사기 위해 상주로 가곤했어요. 좋은 재료로 담근 김장이라야 그만큼 맛이 있다는 거지요. 고추는 수천 평 짓는 덕에 쓸 수 있었고 배추나 무도 직접 농사를 넉넉히 지어 김장에 충당했어요. 김장을 담가 봉사하게 된 동기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였어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소외계층 노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잘해드리는 것이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아내와 생각이 같아 해올 수 있는 일이었지요.”

이웃위한 김치봉사 힘·건강 얻는 일석이조 효과
지난 1997년 충남대학교에서 두 번의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현재까지 잘 살고 있는 아내는 “당시 수술이 잘되면 5년 정도 살 수 있다고 조언했으나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김병국 교수님을 정말 뵙고 싶다”고 말했다.
남을 돕고 사는 인생전환으로 덤으로 부여받은 이들 부부의 행복은 어렵지만 남을 돕는 속에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소외계층을 돕는 봉사의 마음으로 전환한 이들 부부는 김장을 담가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새로 시작한 제2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가난을 벗기 위해 물론 노력도 해야 하지만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나니 자신에게 저절로 힘이 생기고 그 힘을 밑천 삼아 건강도 허락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알게 됐어요.”

마로면의 겨울산타 김장봉사로 소중한 사랑 남겨
베트남 참전으로 얻은 지병 탓에 지금도 대전과 서울보훈병원을 오가고 있는 남편 이승영씨와 뒤늦게 찾아온 뇌경색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는 아내 어복식씨는 매년 김장을 함께 해왔던 오천리부녀회(회장 정정숙) 회원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올해 고추와 배추농사가 잘 안 돼 매년 해왔던 김장보다 적은 4백포기를 담가 소외계층에게 전달했다.
“부모처럼 생각하고 매년 소외계층 노인들을 위해 김장담그기를 해왔지만 이제는 둘 다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올해까지만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자녀들도 한사코 걱정들이 많아 내린 결정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봉사·양육 등을 성공적으로 해낸 이들 부부는 “누구에게 알리고 싶어 한 일도 아닌데 오히려 부끄럽다”며 마로면의 겨울산타처럼 이웃에게 김장통한 사랑실천이라는 아름다운 메아리를 남기고 있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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