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보은의 자랑 삼년산성에서 힘찬 계사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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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보은의 자랑 삼년산성에서 힘찬 계사년을
  • 김인호 기자
  • 승인 2013.01.03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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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오정산에 위치한 사적 235호 삼년산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고성이며 보은군의 대표적 해맞이 명소다. 보은군은 해마다 새해 해맞이 행사를 삼년산성 동문지 성벽에서 열고 힘찬 새해를 출발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아쉽게도 눈이 내려 해맞이 행사를 할 수 없게 됐지만 새해 희망과 기상을 다지기에 더할 수 없는 장소로 손색이 없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된 삼년산성은 산 정상에 오르기에도 부담이 없다. 한 시간이면 족하다. <편집자주>

◇ 한때는 천덕꾸러기
삼년산성은 복원에 실패한 대표적 상징물로 거론되기고 했다. 성돌 재질이 본래 것과 다른데다 축성방식도 달리해 새로 복원한 성곽에서는 예스러운 풍취나 그윽함을 볼 수 없다는 자조마저 나왔었다. 보은군이 지난 2000년부터 종전 복원위주의 정비사업에서 탈피, 부분보수와 붕괴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정비에 포커스를 맞춘 것도 실상 이 때문이었다.

△ 끝 모를 복원공사…430m복원에 40년 소비
1971년 성곽보수를 시작한 이후 작년까지 근 40년 동안 사업비 75억여원을 투입해 전면보수430m, 성벽내부 수습보수 200여m의 복원이 진행됐다. 연못터(아미지)와 문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탐방로 정비 등의 조경공사도 병행했다.
하지만 삼년산성의 직접적인 복원사업은 1979년 보은 삼년산성 기초조사 보고서를 통해 산성의 보존방안 탐색을 제시하였지만 이듬해인 1980년 보은지역의 집중호우로 서문지 부분이 무너지면서 본격화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충북도와 보은군은 삼년산성의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198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도움으로 성내에 집수되는 다량의 물을 성밖으로 배수키 위한 기본자료의 수집과 성내에 현존하였을 옛 연못을 복원 정비키 위한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수해 당시 응급발굴로 시작된 조사보고는 서문지에 잔여한 신방석 등의 유구가 두러나고 성내외를 잇는 통행로가 유실돼 일정한 보축을 요하게 됐다.
이어 발표된 삼년산성 서문지 조사개보는 정비계획으로 성내의 유수를 배수시키는 방안으로 현재의 서문유구와 그 보강을 위한 보축 아래 암거 설치와 연못지의 준설 정비를 하되 수구지의 유구는 원상을 보존하도록 조처하고 향후 완전한 산성의 보호와 정비를 위한 정밀한 조사와 연차적인 보수 정비 계획을 수립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조사 발굴 후 간헐적인 각계각층이 답사를 진행했으나 종합적인 보존대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예산과 보다 정확한 지표조사만의 과제를 남기고 서문지와 허물어진 축성의 보축만을 진행하게 됐다.
군은 작년까지 5년간 복원사업에 사업비 25억원을 들여 남문지 및 곡성 보수 2개소, 성벽내측 수습정비 570m, 화장실 및 휴게시설 등의 편의 시설등을 손질했다. 이후 성내 보은사 및 아미지 주변과 동남곡성에 대해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삼년산성에 대한 학술조사는 2005년 중원문화재연구원의 ‘아미지 정비구역 발굴조사’ 등 7~8차례 이뤄졌다. 학술조사결과 자문위원들은 성벽에 대한 복원위주로 진행된 삼년산성의 정비와 조사자마다 다르게 파악하고 있는 삼년산성의 제원에 대한 문제점을 짚었다.
따라서 향후 삼년산성에 대한 조사는 우선 산성의 제원부터 정확히 파악해 전체 평면 및 단면, 입면과 시설물의 현황을 정확히 밝히는 조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또 삼년산성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에 대한 정밀지표조사 및 발굴조사를 통해 국가적으로 지정해 더 이상의 훼손과 도굴이 발생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은 산성의 성곽복원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훼손을 방지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삼년산성 고분군 정비사업 추진
보은군은 올해부터 삼년산성(사진) 주변인 대야리, 어암리, 평각리, 풍취리 일원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고분군 문화재 지정 및 발굴조사를 실시해 복원을 위한 기초작업을 완료하고 2014년에 산성연결 탐방로 개설, 고분공원을 조성,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보은군은 지난해 10월 '삼년산성 고분군 종합학술조사용역'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용역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은 용역결과 삼년산성 고분군은 삼년산성 주변인 대야리, 어암리, 평각리, 풍취리 일원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전체면적이 600㏊에 달한다. 봉분직경 15~20m에 이르는 대형분이 168개소, 10m 내외의 중형고분이 141개소, 소형분이 1,335개소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했다.
고분은 축조방식과 주변에서 수습되는 유물 등으로 볼 때 삼년산성이 축조·경영된 시기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에 신라인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의 신라 고분군 중 직경 20m에 달하는 대형의 봉토분과 많은 수의 무덤이 조사된 유적은 영남지방을 제외하고는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이 유일하다.
삼년산성 고분군은 고대 산성중 유일하게 축성시기가 밝혀진 삼년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신라의 북방진출과 과정과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은군은 학술용역이 완료됨에 따라 용역결과를 토대로 문화재 지정과 발굴조사, 고분복원, 고분공원조성 등 '삼년산성 고분군 정비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삼년산성 고분군 종합학술조사용역'에는 도비 및 군비 2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됐고, 2011년 5월에 착수해 지난 6월에 현지조사를 완료하고 10월에 수습유물에 대한 실측과 보존처리를 완료했다.

◇사적 235호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5세기 말,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졌던 삼국시대에 우리 국토의 동남지역에서 약소국으로 머물러 있었던 신라가 치열한 영토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경쟁 국가를 물리치면서 어떻게 위대한 통일국가로 갈 수 있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를 푸는 나침반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보은읍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충북 보은군 어암리 오정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325m의 높지 않은 오정산은 정상부가 마치 바구니처럼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봉이다.
삼년산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약 2000여 개의 산성중 유일하게 산성의 축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470년 신라 자비왕 13년에 처음 석성을 쌓고 16년 뒤인 서기 486년에 장정 삼천 명을 동원하여 중축하였으며 서기 742년 경덕왕 원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신라의 역대 왕 중에서 최초로 보은의 지역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삼년산성을 쌓았던 자비왕은 신라가 지방 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나 최초로 부자세습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다. 또한 영토를 확장하며 남진을 계속하던 고구려의 예속과 백제와 교류를 갖고 있던 왜인들의 빈번한 침입에 시달리던 시기의 왕이었다. 자비왕은 선대에 백제와 체결한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재위 21년 기간 동안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일선 요새 지역에 수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고구려 침입에 대비한 왕이다.
자비왕 시대에 니하성(泥河城), 모로성(芼老城),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 등이 축조되었고 삼년산성도 이시기에 처음 축조된 것이다.
산성명칭이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고 한 것에는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본시 삼년산성이 축성된 보은의 삼국시대 명칭이 삼년군, 삼년산군으로 불렸기 때문이라고 하다. 보은의 원지명이 애초에는 삼년(三年)이었고 그 후 보령(保齡)으로 불리다가 후대에 와서 충남의 보령(保寧)과 발음이 비슷해 보은(保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다른 것은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외에 산성의 명칭은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는 오정산성이 옛 보은현의 동쪽 5리에 있는데 둘레가 1,200보 또는 3,699척이라 하였으며, 성안에는 우물이 6개소 또는 5개소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오항산석성(烏項山石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으로, 대통지지에는 오정산고성(烏頂山古城)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삼년산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다.
산성은 최초로 자비왕이 3년이란 기간에 걸쳐 축성되었으며 그의 아들 소지왕이 486년 아버지가 쌓았던 산성을 개축하기 위하여 보은에서 60km나 떨어진 지금의 경북 선산인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하였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신라가 보은이란 지역에 하나의 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신라가 이 산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알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삼년산성은 둘레가 1680m로서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성벽의 대부분을 내외협축(內外夾築)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 높이 13~20m, 폭 8~10m 이다. 산성은 주로 산등을 따라 이어진 능선의 언덕 위에서 밖으로 기울어진 경사면의 훨씬 아래쪽에 기단을 잡아 돌을 쌓기 시작하여, 바깥벽의 돌쌓기가 적당한 높이에 이르면 안쪽에서도 함께 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오늘 날의 8톤 트럭으로 약 2만 5천대 분량에 해당하는 판석 약 1천만장의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오정사의 능선을 따라 문지 4개소, 옹성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산성의 평면구조는 동쪽, 남쪽, 북쪽의 산봉우리와 서쪽의 계곡을 감싸고 석축성벽을 돌린 포곡식 산성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 쌓기, 한 켜는 세로 쌓기로 축조하였기 때문에 성벽이 견고하다. 석재는 대개 장방형이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일정하지 않아 13~30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 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도 막대하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4중의 계단식으로 쌓았다.
수구는 지형상 가장 낮은 서쪽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쪽에는 지상에서 1m 되는 성벽 부분에 65 X 45cm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문지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4개가 있었으며 성벽사이의 웅성에 의해서 보호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던 서문은 성 밖 하단에 자연암반을 지나 성벽까지 기어올라야 하고 성문은 옹성으로 보호되며 성문은 바깥쪽으로 열리도록 되어있어 밀거나 때려서 열기 어려우며 연다 해도 바로 연못이 있어 모르고 들어올 경우 빠지도록 되어 있다. 동문은 성벽 자체를 Z자 형으로 꺾어 놓아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돼 있다. 북문은 앞으로 2중 차단 석축을 S자형으로 돌아들어 오는 구조로 웅성을 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문은 5M 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들어 갈 수 없게 성벽 위쪽에 문이 매달려 있었다.
한편 4개소의 옹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적으로 적이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논과 여러 개의 건물터가 나오는 등 자체적으로 생활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단병력 규모인 약 1만이 생활 할 수 있었다. 우물터로는 아미지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개소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1980년 7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 부분이 무너져 내라고 유구가 드러나 발굴 조사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과 주초석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성문은 문지의 문지방석에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분석 한 결과 중심거리가 1.66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의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아 출토되어 이 성의 사용 시기를 말해 주고 있다. 신라시대의 석축기술이 응집되어 나타난 난공불락의 여새였던 삼년산성은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공략되지 않은 성이었다.
삼년산성은 470년에 축조된 이래 10세기 까지 약 500년 동안 신라의 역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나타낸 곳이다. 관산성 전투 때에 삼년산성은 중심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매복으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사건이 그것이다.
또한 삼년산성은 통일 전쟁 시 백제공격을 위한 전략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 했던 곳이다. 김유신 군대는 삼년산성 - 산계리토성(옥천) - 장군재(옥천) - 구진벼루(옥천) - 군서(옥천) - 마전, 금산 - 탄현을 경유 황산벌로 진격하여 계백이 거느린 백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백제 정벌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사신인 왕문도가 당황제의 조서를 신라의 태종 무열왕에게 전달하는 의식을 이곳 삼년산성에서 거행하기도 하였다. 즉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곳 삼년산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의 사자가 오자 이를 삼년산성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김헌창의 난 때 거점지로도 이용되었으며 고려 태조 1년(918)에 왕건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도 이용된 기록이 있다. 성 안에는 근래에 세운 보은사라는 절이 있다.
삼년산성은 경상·전라·충청 교착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쪽도 진출할 수 없는 삼남의 요충지였다.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상주방면으로는 관기산성이 상주방면과 청산방면을 막는 한편 금계천이 합류되는 보청천을 통해 청산의 산계리토성(굴산성)과 통하게 되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삼년산성의 서남쪽으로는 청산방면을 거쳐 영동·옥천 방면의 많은 성들과 연결된다.
북으로는 바로 마주 건너다 보이는 보은읍 학림리의 함림산성을 거쳐 창리의 주성산성, 미원의 성재산성과 연결되고 여기에 청주의 상당산성과 구녀산성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또 북동쪽으로 백현산성을 거쳐 청천, 괴산 방면으로 이어 진다. 보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삼년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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