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딛고 희망 일궈낸 다문화가정의 희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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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딛고 희망 일궈낸 다문화가정의 희망가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2.09.20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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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수 보은경찰서 보일러기능기사
우리가 사는 곳을 뒤돌아보면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소박한 행복과 희망을 가꾸며 사는 이웃들이 있다. 후천적인 장애를 딛고 성실한 다문화가정의 가장으로서 두 자녀를 키우며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생활인을 만났다. 그 주인공은 보은경찰서에서 무려 16년간 냉난방시스템을 책임지고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해온 임재수(46)씨로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쌉싸래한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인생의 거울’인 어머니 중풍으로 앓아눕자 한집살림 결정
“늘 제 인생에서 반듯한 거울이 되어주셨던 올해 70세의 어머니가 수년 전 중풍으로 앓아 누우셨어요. 제가 철없던 시절 당했던 사고 때보다 더 가슴이 무너지고 힘들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두 집 살림을 한 집 살림으로 합쳐 살게 되었지요.”
보은읍 중초리 출신으로 보은고등학교(8회)를 나온 그는 5남1녀 중 막내로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부모 밑에서 우직하지만 강직한 성정을 배우며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입대 전 사출기 공장에서 안전사고로 오른쪽손가락 잃어
“제게 극적으로 펼쳐졌던 불행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순탄치만은 않다는 인생의 철칙을 배우게 한 계기가 됐어요. 입대 전, 더 나은 인생설계를 위해 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열관리사 2급자격증을 취득하고 쉴 겸해서 고향에 내려와 있었어요. 호적이 남들보다 느린 탓에 여유도 있었고, 그러나 인생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한 명분으로 상경하게 되는 도전을 시도했지요. 처음엔 서울 천호동의 인형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시 경기도 부천소재 삼정공단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취업하게 됐어요. 사출기 금형공장으로 차재떨이를 제작하는 곳이었어요. 저를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안전사고가 일어난 것은 새벽, 교대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발생했어요. 당시 회사는 안전장치를 무시하고 작업을 한 탓에 오른쪽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어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세상이 컴컴해져 앞날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암담한 시절이었어요.”

도전 인생에서 좌절 인생으로 떨어진 절망의 순간 맛봐
그는 오른쪽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이후 그에게 있었던 핑크빛 미래는 도전인생에서 좌절의 인생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순간을 맞게 된다.
“22년간을 오른쪽 손으로 자연스럽게 생활을 해오다가 사고이후 왼쪽 손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 앞에서 오로지 좌절과 절망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30세 때 첫 결혼은 두 달 만에 파경을 맞았고, 40세 때 또 한 번의 극한 좌절 이후 전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싶은 오기가 발동을 하더군요. 물론 그 때 가장 용기와 희망을 준분은 저의 어머니로 그 힘이 저에게 열심히 사는 희망을 안겨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죠.”
만혼에 보은군 대추축제 행사인 전통혼례식으로 아내 맞아
절망에서 희망으로, 좌절에서 용기로 변화 되던 그 때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만혼이지만 다문화가정을 일구는 새로운 인생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6년 전, 그의 나이 40세, 14년 차이가 나는 젊디젊은 꽃 같은 부인인 베트남 출신 여성인 도안티호아(32)를 만났다.
“결혼을 위해 베트남 방문을 세 번 정도 했어요. 베트남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한국에서 지난 2006년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치렀지요. 제 인생에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결혼식이된 것은 바로 보은군 대추축제 행사 때 일부행사로 거행된 전통혼례를 통해 다중의 지역민을 모시고 결혼 신고를 한 셈이 됐지요(웃음). 2007년 1월 19일, 재입국한 아내는 그해 11월 장남인 재춘을 출산했어요. 모든 인생이 정해진 각본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됐어요. 일을 고집하는 아내의 요청으로 보은군다문화센터에서 방문지도사를 교육받았어요. 50시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내는 방문지도사를 교육받았어요. 당시 걸음도 채 떼지 못하는 아이를 놓고 다니려니 몸 고생,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방문지도사 시절, 다문화여성들의 도움요청 문자메시지 쇄도
“지금도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와본 한국생활에 빠른 적응을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주변에 같은 고향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방문지도사는 작년까지 다니고 이제는 정리를 했어요. 정부에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배려를 잘 해주셔서 무척 감사하죠. 그러나 여전히 다문화여성들의 공통적인 애로사항은 주로 시어른들과 가족들과의 소통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아내를 통해 간접으로 알게 된 일이지만 다문화여성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십 통의 도움을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였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그 만큼 가족 간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한 일화로는 수한면 소재 다문화가정이었는데 수년 동안 며느리가 시댁 어른들께 ”밥 먹어“로 통했다고 하더군요.(웃음) 아내는 물불 안 가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그러나 어느 날은 정말 힘이 든다고 얘기하더군요. 집안일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로 아마 방문지도사를 접은 것 같아요.”

항구도시인 아내의 고향 하이퐁 시 결혼전 후 해 4번 방문
아내의 고향인 하이퐁 시는 항구도시로 3대 도시 안에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내의 고향에는 작년에 갔다 온 것과 합치면 4번째 방문이다.
“삼성생명 후원으로 다녀왔어요. 연탄사업을 하시는 장인은 정말 열심히 살고 계시죠. 그곳에서는 아마 중류층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처갓집을 가자마자 아내가 자궁외임신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수술을 받았어요. 거기다가 9월말~10월초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피해를 보기도 했어요. 방문 기념으로 처갓집에 냉장고를 선물했어요. 너무 좋아들 하셔서 제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어요. 한국 돈 30만원이면 그 나라 제품의 냉장고를 살 수 있었어요. 전기가 하루 두세 번 정도는 나가더라구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선입견 없는 한국교육 되길 희망
“한 2~3년 후면 우리아이들이 커서 초등학교를 입학해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교육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지 않게 배려하는 학교풍토가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베트콩’이란 용어라든지의 비하발언의 용어 등은 아이들이 상처받기 쉬운 말로 조심스러운 것이죠. 그중에서도 특히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좀 더 따뜻한 학교교육을 할 수 있도록 배려있는 교육이 되길 희망합니다.”
억척 생활인으로, 다문화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 한 기관의 냉난방 시스템을 책임지는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알토란같은 행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제 바람은 가족들이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과 앓아 누워있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인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려고 합니다.”
고마운 아내 도안티호아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두 아들 재춘(6) 재동(4)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무한 행복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는 평범하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진정한 생활인임에 틀림없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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